그 구조를 파헤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익숙하지만 조금은 과감한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
55개의 책상과 수건돌리기
교실의 공기는 언제나 약간 탁했고, 분필 가루 냄새가 났으며, 창밖으로는 계절이 무심하게 바뀌고 있었다. 55명 남짓한 인원이 빽빽하게 들어찬 교실에서, 우리는 거의 동일한 물리적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책상 앞을 지켰다. 나는 그 무리 속에서 대략 15등에서 4등 안쪽의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향한 맹렬한 열망이나 타는 듯한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옆에 앉은 녀석보다 조금 더 나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아주 얕고 건조한 경쟁의식만이 우리를 움직이는 연료였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다. 1등부터 55등까지, 그들이 교과서에 쏟아부은 물리적 시간의 총량이나 뇌세포의 피로도는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떤 포인트에서 점수는 벌어졌고 사회는 그 종이 한 장의 미세한 두께를 빌미로, 거대한 신분제의 성벽을 쌓아 올렸다. 약간의 방향성 차이, 혹은 우연히 집중의 스위치가 켜졌던 몇 번의 찰나, 그것도 아니면 자본과 정보력이 만들어낸 환경의 차이가 한 인간의 평생 등급을 결정지었다.[1][2]
문제는 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라진 길 위에서, 화이트칼라라는 티켓을 쥔 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과도한 신성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엑셀 시트 위에서 숫자를 이리저리 옮기고, 그럴싸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그려내는 행위가 세상의 '밸류'를 창출한다고 굳게 믿는다. 반면, 무너진 담장을 새로 쌓고, 고장 난 기계를 고치며, 새벽 배송으로 문 앞에 물건을 내려놓는 물리적 행위는 '공부를 덜 한 자들의 페널티' 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실체가 없는 추상이, 명백한 실체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완성된 것이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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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칼라의 알리바이
여기서 잠시,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해 볼 수 있겠다. "화이트칼라의 업무가 실체가 없다고? 천만의 말씀.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움직이고, 사회의 체계를 유지하는 무형의 인프라 관리자다. 성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유도리와 완충 지대가 있기에 이 복잡한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것이다."맞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훌륭한 논리다. 하지만 이제 조금 더 위험하게 본질을 찔러보자.
흔히 말하는 '사'자 돌림의 국가 공인 전문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우월의식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나는 너희들보다 고등한 지적 능력을 갖췄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나는 육체노동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하게 격리되었다'는 안도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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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지적 능력을 가장 촘촘하고 잔인하게 등급 매겼던 것은 10대 시절의 수능 모의고사와 수학능력평가 점수였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잣대였다. 하지만 그 학업의 결과가 바탕이 되어 압도적인 전문성을 확보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다수 화이트칼라의 삶은 자본 투입 경로와 적당한 타협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공장 노동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학 간판과 현재 자신이 속한 사무 환경으로 끊임없이 계급을 나누려 든다. 왜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루는 논리와 언어, 데이터라는 도구들이 사실은 AI의 발전과 시스템의 변화 앞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허술한 모래성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10대 시절의 수능 점수라는 낡은 부적을 40대가 되어서도 이마에 붙인 채, 실체 있는 노동을 하는 이들을 깎아내리며 자의식을 충전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행위다.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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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위의 유령과 육체의 중력
나 역시 그 추상과 실체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서성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그 교실을 떠나온 이후, 내 삶의 궤적은 꽤나 변덕스러웠다. 어떤 날은 넥타이를 매고 로펌의 차가운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법리와 판례라는 완벽한 추상의 세계를 헤엄쳤다. 또 어떤 날은 카메라 앵글 뒤에서 현장의 사람들과 호흡을 맞췄고, 때로는 땀방울이 눈을 찌르고 컨베이어밸트와 싸우듯이 상차를 하거나 맥주 부패 냄새가 폐부를 찌르는 현장의 한가운데 서 있기도 했다.그리고 때때로 나는 차트를 응시한다. 스마트 머니의 흐름을 쫓고, 공백을 계산하며 룰 베이스의 시스템을 돌린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호화된 세계다. 붉고 푸른 캔들들은 나에게 숫자를 물리적으로 부풀리거나 쪼그라뜨리지만, 그 행위 자체에는 어떤 땀 냄새도 배어 있지 않다. 나는 무형의 데이터 속에서 기회를 사냥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것이 세상에 어떤 '실체적 기여'를 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종종 태안의 인적 드문 밤하늘 아래로 차를 몬다. 그곳에서 파이어 스틸을 긁어 불꽃을 일으키고, 장작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새벽 별을 바라볼 때, 혹은 주방에 서서 파스타 면을 삶고 팬을 돌리며 만테까레의 끈적한 질감을 손끝으로 느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생물학적인 인간으로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뚜렷한 실체성을 회복한다.
로펌의 보존처분이나 시장 차트의 움직임은 전원이 꺼지면 사라지는 유령이지만, 내가 직접 긁어서 피워낸 불꽃과 내가 삶아낸 파스타 한 접시는 중력과 마찰이 증명하는 완벽한 실체다. 그 물리적 노동의 감각이 나를 추상의 늪에서 건져낸다. 화이트칼라의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내 손으로 무언가를 통제하고 완성해 낸다'는 원초적인 감각이다.
넥타이를 고쳐 매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그 권력은, 변기가 막혔을때 오물이 역류하는 순간 단 1초 만에 배관공의 투박한 손아귀 아래로 격하된다.
현장에서 다시 쓰는 이력서
젠슨 황이 배관공을 미래의 유망 직업으로 꼽은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모라벡의 역설이 지배하는 이 이상한 미래에서, 지식의 독점이라는 화이트칼라의 낡은 특권이 붕괴하고 있음을 알리는 서늘한 조종이다.우리가 학창 시절에 받았던 교육적 각인,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험한 일 한다"는 식의 질낮은 협박은 이제 유효 기간을 다했다. 자기 성찰의 차이가 인식을 만든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엑셀 칸을 채우는 행위와 육체노동 사이에 존재했던 그 오만한 위계질서를 무너뜨려야 한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지성'이란, 자신이 다루는 추상적인 시스템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중력의 법칙 위에서 땀 흘리는 블루칼라의 실체적 노동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이트칼라라는 셔츠의 색깔은 당신이 남들보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증명서는 아니다. 모니터의 전원이 꺼지고, 시스템이 멈추고, AI가 당신의 보고서를 1초 만에 대체하는 그 서늘한 침묵의 순간. 그때 당신의 맨손에는 과연 무엇이 쥐어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노동은 그저 한없이 가벼운 헛발질에 불과할 뿐이다. 조용히, 그러나 아주 무겁게, 시대의 축이 이동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현장 노동’ 에서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써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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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개인적인 관찰과 주관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작성된 사회 분석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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