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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의 일이다.
나는 뚜렷한 목적지 하나 없이, 평촌역 인근의 거리를 부유하고 있었다. 잡코리아니 알바몬이니 하는 친절하고도 매끄러운 디지털의 은총이 아직 이 땅의 구직자들에게 내려앉기 전, 아날로그의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으레 지하철역 가판대에서 벼룩시장이나 교차로 같은 신문지를 한 장 빼어 들고 붉은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뒤적거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작정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혹시 사람 구하나요?"라고 묻는, 지극히 원초적이고도 안면몰수형의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다.
어느 날 오후, 나는 감자튀김의 달착지근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맥도널드 문을 열고 들어가 밑도 끝도 없이 알바 자리가 있냐고 구걸을 했다. 최소한의 이력서 한 장, 아니,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얄팍한 변명거리 하나 준비하지 않은 채였다. 단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막연한 충동 외에는 어떤 철학도 없었던 그 낯간지러운 기억은, 지금 돌이켜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치기 어리다.[1]그 어설픈 구직 활동의 종착지로 내가 안착한 곳은, 동네 골목 어귀에서 매일같이 '가구 왕창 세일'이라는 촌스러운 붉은 현수막을 펄럭이던 유일무이한 가구 점포였다.
아침 10시. 무거운 푸른색 방수포를 걷어 올리고 의자와 서랍장들을 가게 문 앞 도로변으로 밀어내어 진열하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뒷쪽 창고에 합판 냄새와 먼지가 뒤엉킨 창고를 정리하고 나면,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 동네에 경쟁자가 없어서였을까. 촌스러운 현수막의 마법 덕분이었을까. 하루에 두세 개 정도는 덩치 큰 장롱이나 소파가 팔려나갔고, 그럴 때면 나는 사장님이 모는 낡은 트럭 조수석에 올라타 배송을 나갔다. 오후 7시까지 일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파리만 날리는 날이면 6시에 쫓기듯 퇴근하는 날도 허다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묵직한 시간의 대가로 내 손에 쥐어진 것은 50만 원이라는 지폐 다발이었다. 월급봉투를 건네던 날, 사장님 사모님의 얼굴에 찰나처럼 스치던 그 미묘한 떨림과 생계의 부담감. 까놓고 말해서 고작 50만 원 쥐여주면서 뭘 저렇게 아까워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말단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묘하게 씁쓸하고도 숨 막히는 타인의 진짜 표정이었다.[2]
삶의 관성과 운명
가구를 싣고 누군가의 집 현관문을 넘는다는 것은, 타인의 가장 은밀한 사적 공간을 합법적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인류학적 탐험이다. 가구점 매장에서 쏟아지는 형광 조명을 받으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소파는, 고객의 비좁고 정돈되지 않은 거실 한복판에 놓이는 순간 급격히 현실의 민낯으로 곤두박질친다. 사람들은 전시장의 가구를 결제하며, 자신의 일상이 저 쇼룸의 가구처럼 순식간에 윤택해질 것이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배송 현장에서 마주하는 것은, 낡은 장판 위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커다란 식탁과, 새 가구의 위용에 밀려 더욱 초라해 보이는 찌든 살림살이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물건이 인간의 삶을 바꾸는가, 아니면 눅눅한 삶의 관성이 결국 물건의 운명을 집어삼키는가.[3]
현관문이라는 사회적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 사람의 진짜 얼굴도 함께 무장해제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소파를 짊어지고 온 낯선 배송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진짜 교양과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에 수건을 건네는 따뜻한 온기가 있는가 하면, 마치 투명 인간을 대하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위치만 까딱까딱 지시하는 서늘한 오만함도 존재한다. 나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거나, 나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대하는 방식.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명문대 졸업장이나 고급 외제 차로도 위장할 수 없는, 인격의 가장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사실을 매일의 배송 현장에서 체감했다.[4]
현관문이라는 사회적 결계가 무너지는 순간, 사람의 진짜 얼굴도 함께 무장해제된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소파를 짊어지고 온 낯선 배송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진짜 교양과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에 수건을 건네는 따뜻한 온기가 있는가 하면, 마치 투명 인간을 대하듯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위치만 까딱까딱 지시하는 서늘한 오만함도 존재한다. 나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거나, 나에게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대하는 방식.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명문대 졸업장이나 고급 외제 차로도 위장할 수 없는, 인격의 가장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사실을 매일의 배송 현장에서 체감했다.[4]
감추어지는 미학과 줄다리기
무엇보다 가구 배송의 현장에서 배운 나름 실용 정보이자 치열한 삶의 기술은, 다름 아닌 '장롱 수평 맞추기'였다. 오래된 주택의 방바닥은 십중팔구 기울어져 있다. 수평이 어긋나 문짝이 덜컥거리고 제대로 닫히지 않는 장롱을 마주하면, 사장님은 말없이 장롱의 센터를 손으로 꾹꾹 밀어 흔들림의 근원지를 파악했다. 그러고는 두꺼운 종이를 여러 겹 접어, 앞쪽이 아닌 장롱의 '뒷굽' 쪽에 은밀히 괴어 넣었다. 앞쪽에 종이를 받치면 미관상 티가 나고 고객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을 때는 완벽한 수직과 수평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완벽함은 오직 어두운 장롱 뒷면에 쑤셔 넣은 꼬깃꼬깃한 종이 쪼가리들이 만들어낸 아슬아슬한 환상일 뿐이었다.[5][6]
이러한 눈속임의 미학은 원목 책상 AS 현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나무 특유의 시커먼 옹이 부분을 불량품이라며 길길이 날뛰는 고객의 호출을 받으면, 사장님은 만물상회 주인처럼 주머니에서 크레파스 한 자루와 사포 조각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은 옹이와 비슷한 색깔의 크레파스로 그 검은 흉터를 슥슥 덧칠하고는, 사포로 표면을 부드럽게 갈아내어 기가 막히게 흔적을 지워버렸다. 요즘같이 쿠팡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로켓 반품'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본다면 당장 소비자보호원에 고발을 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동네 악덕 가구점의 만행'이라며 박제를 당할 일이다.[7]
하지만 그 시절에는 달랐다. "이게 자연스러운 진짜 원목의 증거이자 맛입니다"라는 사장님의 능구렁이 같은 방어 논리와, "누굴 바보로 아냐, 당장 새 걸로 교체해라!"라는 고객의 분노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광경. 그것은 동네 장사라는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알량한 마진율을 지켜내려는 상인과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소비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하고도 처절한 줄다리기였다.[8][9]
이쯤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 할지도 모른다. "야, 그거 입바른 소리로 포장해서 그렇지 결국 고객 기만이고 사기 아니냐? 장롱 뒤에 종이 쪼가리나 쑤셔 넣고, 하자를 크레파스로 칠해서 넘기는 게 무슨 얼어 죽을 인류애야? 그냥 50만 원 주고 알바 부려먹는 동네 영세 상인의 치졸한 꼼수지!"
이러한 눈속임의 미학은 원목 책상 AS 현장에서 절정에 달했다. 나무 특유의 시커먼 옹이 부분을 불량품이라며 길길이 날뛰는 고객의 호출을 받으면, 사장님은 만물상회 주인처럼 주머니에서 크레파스 한 자루와 사포 조각을 꺼내 들었다. 사장님은 옹이와 비슷한 색깔의 크레파스로 그 검은 흉터를 슥슥 덧칠하고는, 사포로 표면을 부드럽게 갈아내어 기가 막히게 흔적을 지워버렸다. 요즘같이 쿠팡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로켓 반품'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본다면 당장 소비자보호원에 고발을 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동네 악덕 가구점의 만행'이라며 박제를 당할 일이다.[7]
하지만 그 시절에는 달랐다. "이게 자연스러운 진짜 원목의 증거이자 맛입니다"라는 사장님의 능구렁이 같은 방어 논리와, "누굴 바보로 아냐, 당장 새 걸로 교체해라!"라는 고객의 분노가 날카롭게 부딪히는 광경. 그것은 동네 장사라는 좁은 바운더리 안에서, 알량한 마진율을 지켜내려는 상인과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소비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하고도 처절한 줄다리기였다.[8][9]
이쯤에서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 할지도 모른다. "야, 그거 입바른 소리로 포장해서 그렇지 결국 고객 기만이고 사기 아니냐? 장롱 뒤에 종이 쪼가리나 쑤셔 넣고, 하자를 크레파스로 칠해서 넘기는 게 무슨 얼어 죽을 인류애야? 그냥 50만 원 주고 알바 부려먹는 동네 영세 상인의 치졸한 꼼수지!"
그렇다. 그 지적은 백 번 옳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얄팍한 꼼수였고, 마이너스 마진을 피하기 위한 밑바닥 상술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과감하게 우리 내면의 거울을 들여다보자. 당신과 나, 우리의 삶은 과연 그 비루한 종이 쪼가리와 싸구려 크레파스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자유로운가?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그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쇼룸에 완벽한 '앞면'을 전시하기 위해, 아무도 보지 않는 삶의 '뒷면'에 무수한 종이 쪼가리들을 접어 구겨 넣고 있지 않은가.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 잔고의 공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인간관계, 밤마다 찾아오는 이름 모를 우울감. 이 모든 삶의 덜컹거림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뒷굽 어딘가에 필사적으로 거짓말과 변명, 허세라는 종이를 덧대어가며 간신히 일상의 수평을 맞추고 살아간다. 내면의 시커먼 옹이와 상처, 뒤틀린 본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는 '자기계발'이라는 그럴듯한 크레파스를 매일 아침 얼굴에 떡칠하고, '사회생활'이라는 거친 사포로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문질러대며 "이게 쿨하고 성숙한 진짜 내 모습입니다"라고 세상에 박박 우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 가구점 사장님은 악덕 상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본질과 기만적인 생존술을 너무나도 일찍 간파해 버린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거리의 성자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이 무거운 중력의 장에서, 적당한 타협과 은밀한 눈속임 없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버텨낼 수 없다는 뼈아픈 진리. 그는 낡은 크레파스 한 자루와 이면지 조각으로 그 위대한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결국, 보이지 않게 뒤쪽에 쑤셔 넣은 꼬깃한 종이 몇 장으로 간신히 수평을 유지하며 버티고 서 있는, 수평 틀어진 짝짝이 장롱에 불과한것같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5층짜리 낡은 빌라의 좁은 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장롱 짝을 짊어지고 오를 때면 인간의 나약한 육체가 견뎌내야만 하는 물리적 법칙의 잔혹함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중력과 마찰력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요령을 피우거나 타협할 수 없는 그 묵직한 가구의 무게감은, 우리가 삶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고통의 질량을 온몸으로 짊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땀에 젖은 등짝으로 직접 새겨주었다.
가구를 실은 낡은 트럭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단칸방부터, 현관문부터 대리석이 깔린 고급 주택까지 도시의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을 흘러 다녔다. 각기 다른 냄새와 온도를 가진 타인의 주거 환경을 무방비로 넘나들며, 나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계급적 단층과 불평등의 질감을 생생하게 만져볼 수 있었다. 그것은 훗날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도서관에 앉아 텍스트와 통계 데이터로만 읽어내는 활자화된 사회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피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날것의 현장감이었다.
우리는 모두 타인에게, 그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쇼룸에 완벽한 '앞면'을 전시하기 위해, 아무도 보지 않는 삶의 '뒷면'에 무수한 종이 쪼가리들을 접어 구겨 넣고 있지 않은가.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 잔고의 공포,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인간관계, 밤마다 찾아오는 이름 모를 우울감. 이 모든 삶의 덜컹거림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뒷굽 어딘가에 필사적으로 거짓말과 변명, 허세라는 종이를 덧대어가며 간신히 일상의 수평을 맞추고 살아간다. 내면의 시커먼 옹이와 상처, 뒤틀린 본성을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는 '자기계발'이라는 그럴듯한 크레파스를 매일 아침 얼굴에 떡칠하고, '사회생활'이라는 거친 사포로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문질러대며 "이게 쿨하고 성숙한 진짜 내 모습입니다"라고 세상에 박박 우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 가구점 사장님은 악덕 상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본질과 기만적인 생존술을 너무나도 일찍 간파해 버린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거리의 성자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라는 이 무거운 중력의 장에서, 적당한 타협과 은밀한 눈속임 없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버텨낼 수 없다는 뼈아픈 진리. 그는 낡은 크레파스 한 자루와 이면지 조각으로 그 위대한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결국, 보이지 않게 뒤쪽에 쑤셔 넣은 꼬깃한 종이 몇 장으로 간신히 수평을 유지하며 버티고 서 있는, 수평 틀어진 짝짝이 장롱에 불과한것같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5층짜리 낡은 빌라의 좁은 계단을, 숨을 헐떡이며 무거운 장롱 짝을 짊어지고 오를 때면 인간의 나약한 육체가 견뎌내야만 하는 물리적 법칙의 잔혹함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중력과 마찰력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요령을 피우거나 타협할 수 없는 그 묵직한 가구의 무게감은, 우리가 삶에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고통의 질량을 온몸으로 짊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땀에 젖은 등짝으로 직접 새겨주었다.
가구를 실은 낡은 트럭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단칸방부터, 현관문부터 대리석이 깔린 고급 주택까지 도시의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을 흘러 다녔다. 각기 다른 냄새와 온도를 가진 타인의 주거 환경을 무방비로 넘나들며, 나는 한국 사회의 견고한 계급적 단층과 불평등의 질감을 생생하게 만져볼 수 있었다. 그것은 훗날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도서관에 앉아 텍스트와 통계 데이터로만 읽어내는 활자화된 사회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피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날것의 현장감이었다.
육체 노동의 궤적과 성찰사이
가구점에서 일하며 보냈던 스무 살의 그 짧고도 지난했던 시간은, 단순히 50만 원짜리 싸구려 육체노동의 궤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불안한 공간을 환상으로 위장하는가', 그리고 '그 위장된 공간 속에서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고 수평을 잡으며 살아남는가'를 목격한, 내 생애 인상깊던 사회 관찰기였다.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삐걱거리고 어긋나는 자신의 일상 한구석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종이 쪼가리를 접어 밀어 넣고 있을 것이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퍽퍽한 현실의 불공평함을 탓하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평을 맞추려 애쓰는 그 옹색하고도 눈물겨운 치열함. 어쩌면 우리의 텅 빈 삶을 채워주는 진짜 의미 있는 가구는, 전시장 조명 아래 놓인 수백만 원짜리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가 아닐 것이다. 그 견딜 수 없는 덜컹거림과 불균형을 기꺼이 감내하며, 구겨진 종이 몇 장으로 버텨내면서도 끝내 살아가는 인간의 그 끈질긴 체념과 유머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간다. 내 삶의 장롱 문은 오늘따라 제대로 아귀가 맞물려 닫혀 있는지, 슬며시 뒷굽 쪽에 숨겨둔 낡은 종이 쪼가리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그런 시간이다.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삐걱거리고 어긋나는 자신의 일상 한구석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종이 쪼가리를 접어 밀어 넣고 있을 것이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퍽퍽한 현실의 불공평함을 탓하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평을 맞추려 애쓰는 그 옹색하고도 눈물겨운 치열함. 어쩌면 우리의 텅 빈 삶을 채워주는 진짜 의미 있는 가구는, 전시장 조명 아래 놓인 수백만 원짜리 이탈리아제 가죽 소파가 아닐 것이다. 그 견딜 수 없는 덜컹거림과 불균형을 기꺼이 감내하며, 구겨진 종이 몇 장으로 버텨내면서도 끝내 살아가는 인간의 그 끈질긴 체념과 유머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간다. 내 삶의 장롱 문은 오늘따라 제대로 아귀가 맞물려 닫혀 있는지, 슬며시 뒷굽 쪽에 숨겨둔 낡은 종이 쪼가리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그런 시간이다.
출처
[1]구직활동의 매체 생활정보지:
[2]최저임금제:
https://namu.wiki/w/%EC%B5%9C%EC%A0%80%EC%9E%84%EA%B8%88%EC%A0%9C
[3]디드로 효과
[4]한국의 주택계급론
[5]가구 수평맞추는 법
[7]어빙 고프먼의 자아 연출의 사회학
[8]가구 셀프 보수법
[9]가구 셀프 보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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