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해석
밤은 깊었고, 29개월 된 어린 아들은 열병에 시달리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먹기 싫어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고, 뒤척이는 작은 몸뚱이를 토닥이다가 거실로 나와 넷플릭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데 며칠이 걸린 것 같다. 화면 속 남자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갔고, 화면 밖 나의 시간은 아이의 울음소리에 맞춰 툭툭 끊어졌다. 그 기묘한 파편의 시간 속에서 나는 데이비드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았다.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각자의 시차를 견디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데우면서, 나는 화면 속에서 점점 어려져 결국 아기가 되어버리는 한 남자의 일생을 관조했다. 그것은 묘하게도 지금 생의 초입을 통과하고 있는 내 아들의 냄새와 겹쳐졌다.
벤자민 버튼 줄거리와 시간의 역설
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지독한 다큐멘터리다먼저, 사람들이 흔히 '아름다운 동화'라 착각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아주 건조하게 복기해 보자.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뉴올리언스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 아이, 태어나자마자 80대 노인의 관절염과 백내장,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졌다. 혐오감을 느낀 아버지는 아이를 양로원 앞에 버리고, 양로원 직원 퀴니가 그를 거둬 '벤자민'이라 부르며 키운다. 벤자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진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고, 예인선에 취직해 거친 선원들과 바다를 누비며,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러시아에서 첫 로맨스도 경험한다.
그렇게 중년의 멋진 외모를 갖추게 된 그는 어린 시절 양로원에서 만났던 소녀, '데이지'와 재회한다. 발레리나의 꿈을 잃고 방황하던 데이지와 벤자민의 신체 나이가 마침내 엇비슷해진 그 짧은 시기, 둘은 미치도록 사랑하고 딸을 낳는다. 하지만 벤자민은 자신이 점점 10대 소년이 되고, 결국 갓난아기가 되어 가족의 짐이 될 것을 안다. 그는 전 재산을 남기고 떠난다. 오랜 세월 후, 백발의 할머니가 된 데이지의 품에 치매에 걸린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돌아온 벤자민이 눈을 감으며 이야기는 끝난다.
사람들은 이 줄거리를 두고 "기발한 상상력"이라며 칭찬한다. 하지만 이건 판타지가 아니다.
현실을 조금만 더 직시해 보면 병실에서 태어난 미약한 아기들을 본 적이 있는가? 피하지방 없이 깡마르고 주름진, 생존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은 그 갓난아기들의 얼굴은 영락없는 애늙은이다. 사실 어떤부류의 인간은 타인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아기 임에도 쪼글쪼글한 '노안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건강한 성인으로 정점을 찍은 뒤, 다시 뇌세포가 파괴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며 누군가의 전적인 돌봄을 받아야 하는 '아기(치매 노인)'의 모습으로 퇴행하다가 죽는다.
감독 데이비드 핀처와 원작자 피츠제럴드는 그저 그 생물학적 생애 주기의 가운데 토막을 물리적으로 뒤집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며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니 낭만적이네"라고 하는건, 인생의 생얼을 깊게 생각한 적 없는자들의 배부른 감상평에 불과하다. 이것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징그럽도록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벤자민 버튼 명장면]유흥가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 교집합
그 다큐멘터리 속에서 가장 소름 돋는 장면은, 벤자민과 그를 버린 친아버지 토마스 버튼이 색시집(사창가)에서 교차하는 순간이다.상류층의 점잖은 단추 공장 사장인 아버지는 매일 밤 색시집에서 쾌락을 좇는 철부지다.
반면, 겉모습은 늙은 노인이지만 속은 세상물정 모르는 청년인 벤자민은 예인선 선장에게 이끌려 그곳에 왔다.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두 남자는 창녀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서 교차하고 둘은 테이블에서 술잔을 부딪친다.
우리는 여기서 기존의 윤리적 잣대를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왜 하필 그들의 재회 장소가 색시집이었을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 이유는 '체면' 때문이었다.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 같은 아들을 자신의 완벽한 부르주아적 삶에 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위선적인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본능만 남은 공간에 와서야, 자신이 내다 버린 '날것의 혈육'과 마주 앉게 된다는 이 구조. 이것이야말로 핀처 감독이 날리는 통렬한 냉소다.
인생의 타이밍은 이토록 기괴하다. 만약 아버지가 일찍 벤자민을 찾았다면 벤자민의 분노에 타죽었을 것이고, 벤자민이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었을 때 찾았다면 대화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속은 청년이고 겉은 노인인 아들과, 겉은 중년이고 속은 짐승인 아버지가 서로의 주파수가 맞아떨어진 유일한 공간. 그곳이 비록 세상에서 가장 천박하다 손가락질받는 사창가일지언정, 그 타이밍의 교집합이 없었다면 훗날 벤자민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유산을 물려받는 화해는 불가능했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깨끗하게 소독된 거실 소파에서 이성적인 대화로 풀리는 인연 따위는 현실에 없다. 때로는 밑바닥의 진흙탕을 뒹굴며 서로의 가장 초라한 밑바닥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맞아떨어지는 서글픈 교집합. 우리는 그것을 묵묵히 기다려야만 한다.
[데이지 택시 사고 시퀀스] 삶의 유기적 얽힘과 연쇄반응
우리는 대개 내 삶의 운전대는 내가 쥐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데이지가 파리의 비 내리는 교차로에서 택시에 치여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 장면을 가만히 뜯어보면, 그 오만한 착각은 산산조각 난다."만약 점원의 손놀림이 1초만 빨랐다면...", "만약 택시 기사가 잠시 멈춰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만약 데이지의 구두끈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벤자민의 건조한 내레이션과 함께 교차 편집되는 이 사소한 변수들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미세한 파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수많은 '만약(If)' 중 단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택시와 데이지는 그 교차로에서 1초의 오차도 없이 충돌하는 완벽한 불행의 교집합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 같은 낭만적인 소리가 아니다. 누군가의 작은 게으름, 누군가의 변덕,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가 나비효과가 되어 전혀 무관해 보이는 연쇄반응을 낼 수 있다는 서늘한 물리법칙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의 궤도에 보이지 않는 파동을 던지며 얽히고설킨 거미줄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핀처 감독의 진짜 비웃음은 그다음 역설에 있다. 그 끔찍한 연쇄반응이 일으킨 파동은, 화려한 발레리나로서 세상을 겉돌던 자존심 강한 데이지의 궤도를 잔인하게 꺾어버림과 동시에 벤자민과의 '가장 완벽한 교집합'으로 그녀를 밀어 넣는 결정적 타점이 되었다. 무너져버린 다리와 날아간 꿈이라는 거대한 상실이 없었다면, 그녀가 벤자민에게 돌아가 온전한 사랑의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을까? 삶은 이토록 잔인하면서도 절묘하게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영국 해협 횡단 실화 모티브] 틸다 스윈튼과의 불륜 그 이상의 의미
자, 여기서 보수적인 도덕군자들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이야기를 해보겠다.영화를 본 어떤 이들은 묻는다. "데이지는 왜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니며, 벤자민은 왜 남의 유부녀랑 러시아 호텔에서 바람을 피우냐. 시대적 배경에 비해 너무 막장 아니냐?"라고.
도덕 교과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라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시대가 보수적이라고 인간의 체온까지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차가운 러시아의 낡은 호텔. 외교관 남편의 지루한 트로피인 와이프로 시들어가던 중년 여성 엘리자베스(틸다 스윈튼)와, 노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아직 여자를 안아본 적 없는 벤자민의 만남. 매일 밤 로비에서 시바스 리갈을 홀짝이며 나누던 대화와 결국 서로의 몸을 탐했던 그 밤들을 그저 '불륜'이라는 납작한 단어로 퉁치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모독이다.
엘리자베스는 젊은 시절 영국 해협(도버해협) 횡단에 도전했다가 폭우 속에서 몇 마일을 남기고 포기한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실패자'라 규정하며 늙어가고 있었다. 벤자민은 육체의 한계에 갇힌 채 세상을 겉돌고 있었다. 두 결핍 덩어리가 부딪혀 낸 마찰열은 단순한 치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심장에 꽂아 넣은 강력한 제세동기였다.
그녀는 "만나서 반가웠어"라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쿨하게 떠난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벤자민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백발의 노인이 된 엘리자베스가 마침내 그 험난한 영국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숨겨둔 진짜 폭탄 같은 메시지다. 세상의 윤리로는 손가락질받을 그 며칠 밤의 일탈이, 예인선 선장이 말했던 그 '벌새의 날갯짓'이 되어 엘리자베스의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이다.
68세의 늙은 몸으로 거센 파도를 가르며 해협을 건너는 그녀의 모습은, 꿈을 이루는데는 나이 따위는 핑계라는 흔해 빠진 자기계발서의 진부함을 압도한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고 느끼지만, 누군가와의 강렬하고 솔직한 교차점 하나만으로도 다시 바다로 뛰어들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몇 살이든, 당신의 껍데기가 얼마나 낡았든 간에.
[치매와 노화의 현실] 벤자민 버튼이 아기로 죽어가는 결말의 진짜 의미
그리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 벤자민은 데이지의 품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안긴다. 치매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데이지가 누구인지조차 망각한 상태로.나는 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아기를 달래다 말고 화면을 한참 정지시켜 두었다. 데이지는 할머니가 되어 있고, 벤자민은 갓난아기다. 현실의 세계에서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라. 이웃들은 그저 데이지가 늦둥이 손자를 돌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데이지는 사람들에게 "이 아기가 사실 내 남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미친 노친네 취급을 받거나 정신병원에 끌려갈 테니까.
세상은 그들이 정해놓은 '정상'의 규격에서 단 1밀리미터라도 벗어난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차가운 사회적 폭력 속에서, 데이지는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을 가슴에 묻은 채 묵묵히 기저귀를 갈고 밤새워 칭얼거리는 '아기 남편'을 달래야 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갓난아기의 눈동자가 잠시 총명하게 빛나며 데이지를 정확히 응시한다. 그 찰나의 눈빛. "나는 당신을 알아. 우리가 나눈 그 미친 듯이 찬란했던 사랑을 전부 기억해."
그 단 1초의 시선 교환을 끝으로 벤자민은 눈을 감는다.
치매 환자를 돌봐본 사람만이 아는, 그 기적처럼 찾아오는 찰나의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데이지는 그 한순간의 시선을 보상받기 위해 그 길고 끔찍한 고립의 시간을 견뎌낸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시계가 거꾸로 도는 신비로운 마법을 빙자해, '인간은 누구나 기저귀를 찬 미약한 상태로 태어나, 결국 다시 기저귀를 찬 치매 노인으로 소멸한다'는 뼈아픈 생물학적 진실에 우아한 포장지를 씌운 다큐멘터리다.

[육아와 부모의 삶] 삶이라는 대하드라마를 견디는 법
다시 거실이다.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으니 다행히 열이 조금 내렸다. 작고 뜨거운 숨결이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지금 나는 가장 미약하고 연약한 이 생명체를 온 힘을 다해 돌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세상을 누빌 것이고, 나는 점차 힘을 잃어 쭈글쭈글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방금 전 영화 속 데이지의 품에 안겼던 벤자민처럼, 기저귀를 찬 채 누군가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무력한 아기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진실이다.
영화 속 시간은 거꾸로 흘렀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종착지였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살아있는 동안 1초에 80번씩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맹렬하게 나의 궤도를 도는 것뿐이다. 위선적인 가면을 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차가운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들 용기를 잃지 않으며, 나와 정반대 편에서 달려오는 누군가와 가장 완벽하게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교집합'의 순간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것.
창밖으로 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아이는 편안한 얼굴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식은땀에 젖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언젠가 노인이 되어 아이의 품에 안길 나의 먼 미래를 상상했다. 그때 서로의 눈동자를 보며 오늘 이 밤의 미약했던 체온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인생이란 꽤 견딜 만한 대하드라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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