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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 속을 유영하던 단세포 생물이 '빛'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기억은 희미하다 아니 사실 상상일거다. 하지만 10억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난자라는 결승선에 골인했을 때의 그 짜릿한 화학반응, 그건 마치 한여름 대구의 폭염 아래서 미지근한 맥주 캔을 땄을 때의 '치익' 하는 소리와 닮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세상에 던져진다. 일종의 '강제 로그인'이랄까.
생각해 보라. 머리를 감다가 나를 쳐다본 어머니의 늘어진 젖은 머리와 시선이 공포스러워 울음을 터뜨렸던 건, 아마도 모성애라는 거대 담론 뒤에 숨겨진 '샴푸의 요정'이 가끔은 내 눈을 따갑게 할 수도있다는 본능적 공포였을 게다. 2층에서 유모차 째로 굴러떨어진 사건? 그건 '중력 가속도(G)'를 온몸으로 체득하려던 나의 조기 과학 교육이었다.
압권은 외갓집 부엌이다. 그곳은 초가집이었고 온돌방에서 뒤로 기어가다 문풍지를 뚫고 부엌으로 굴러떨어져 사커먼 가마솥뚜껑에 오른손을 디어버린 사건. 내 손등엔 화상의 흔적이 남았다. 뜨거움이란 고통은 감각이지만, 흉터는 역사다. 그리고 담벼락 리어카에 매달렸다 깔리며 흙바닥 자갈에 오른쪽 눈옆을 찍힌 상처. 리어카는 쓰러졌고, 나는 깔렸다. '매달리기'를 너무 좋아하다간 눈탱이가 밤탱이 된다는 인생사 원리를 그때 이미 몸으로 깨달았던 걸까?
초가집 마당엔 펌프식 수돗가가 있었다.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대면 지하 깊은 곳의 냉기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마중물 한 바가지가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그 지하의 냉기는, 7월의 정오가 내뿜는 지독한 열기에 지쳐있던 아이의 영혼을 단숨에 어루만져 주던 투명한 침묵의 액체였다.
뒷마당의 꽃밭과 앞마당의 큰 감나무들, 그리고 여덟 채 남짓 모여 살던 일가친척들. 그야말로 '응답하라 1983이자,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꿈도 못 꿀 아날로그 공동체였다.
기억 나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봉준호 영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들이었다. 무섭게 생긴 바보 형 ‘용기’ (용기는 있었으나 지능 스탯을 덜 찍은 비운의 캐릭터), 세 들어 살던 누나 방에 출몰한 초록색 뱀(프로이트가 봤다면 성적 은유라고 했겠지만, 그건 그냥 파충류였다), 그리고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던 동네 형들. 그 형들은 지금쯤 강남 어딘가에서 맨손으로 코인을 잡고 있을까?
해 질 녘, 마루에 앉아 과일을 깎아 먹으며 하늘을 날아가는 왜가리를 보던 풍경. 예쁜 누나도 있었고, 나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게 일상이었다. 심지어 소 배 밑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어른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소가 주저앉으면 압사당한다는 팩트 폭격. 하지만 소의 뱃살은 푹신했고, 그 위험한 평온함은 마치 주식 시장의 거품 같았다.
그리고 대망의 미스터리, 어머니의 증언.
"그때는 도깨비불도 보고, 불새도 보았단다."
어머니, 잠시만요. 도깨비불까지는 이해한다. 당시엔 나병이나 역병으로 죽어 산에 묻힌 이들이 많았으니, 시신 뼈의 인(P) 성분이 자연 발화해 정전기와 썸을 타면 파란 불꽃이 튈 수 있다. 이과적 감성으로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불새'라니? 이건 좀 곤란하다.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남주작(朱雀)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건가? 어머니가 환타지 소설 작가 지망생이 아니었다면, 이건 필시 착시다.
나는 여기서 셜록 홈즈에 빙의해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습지에서 도깨비불이 둥둥 떠다니다가, 마침 지나가던 왜가리나 기러기의 깃에 잠깐 옮겨붙은 게 아닐까? 밤하늘을 가르는 불타는 새. 그건 전설의 고향이 아니라, 그저 '조류의 재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가설. 왜가리는 몸에서 방수용 분말 즉 분말우(Powder Down))라는 것을 흘리는데, 이것이 노을에 반사되어 붉고 하얗게 타오르는 듯한 착시를 줬을수도 있겠다. 즉 불새는 붉은 노을과 분말우를 흘리는 새의 모습이 빛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착시, 이것이 나의 가장 합리적인 '불새 추정'이다. [참고: '불새'의 과학적 정체? 왜가리가 뿌리는 신비로운 가루 '분말우' 알아보기]
불새라는 종은 없지만 불새라 느낄수있는 순간은 존재하는것이다.
어찌 됐든, 그 시절 우리는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고, 흉터는 많았지만 치유가 있었다. 솥뚜껑에 손을 데고, 리어카에 깔리고, 소 밑에 깔릴 뻔하면서도 살아남은 나. 그리고 불타는 새를 보며 경외감을 느꼈던 어머니.
그 시절의 기억은 '불새'처럼 화려하게 타오르진 않더라도, 도깨비불처럼 은은하게 내 무의식의 늪지대를 떠돌고 있다. 물리적 상처가 남긴 자국이 '하드웨어의 스펙'이라면, 외갓집의 풍경과 전설은 내 영혼에 설치된 '초기 OS'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불새가 사실은 '불쌍한 새'의 준말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유년의 상처는 훈장이고, 기억은 원래 제멋대로 편집되는 법이니까.
5살 이전의 기억은 해상도 낮은 흑백 TV처럼 지지직거린다. 하지만 내 몸엔 그 시절의 '로그 파일'이 물리적 흉터로 새겨져 있다.
생각해 보라. 머리를 감다가 나를 쳐다본 어머니의 늘어진 젖은 머리와 시선이 공포스러워 울음을 터뜨렸던 건, 아마도 모성애라는 거대 담론 뒤에 숨겨진 '샴푸의 요정'이 가끔은 내 눈을 따갑게 할 수도있다는 본능적 공포였을 게다. 2층에서 유모차 째로 굴러떨어진 사건? 그건 '중력 가속도(G)'를 온몸으로 체득하려던 나의 조기 과학 교육이었다.
압권은 외갓집 부엌이다. 그곳은 초가집이었고 온돌방에서 뒤로 기어가다 문풍지를 뚫고 부엌으로 굴러떨어져 사커먼 가마솥뚜껑에 오른손을 디어버린 사건. 내 손등엔 화상의 흔적이 남았다. 뜨거움이란 고통은 감각이지만, 흉터는 역사다. 그리고 담벼락 리어카에 매달렸다 깔리며 흙바닥 자갈에 오른쪽 눈옆을 찍힌 상처. 리어카는 쓰러졌고, 나는 깔렸다. '매달리기'를 너무 좋아하다간 눈탱이가 밤탱이 된다는 인생사 원리를 그때 이미 몸으로 깨달았던 걸까?
진정한 서사의 시작은 이 물리적 액션을 지나 도착한 그시절 외갓집이다.
아버지가 외무고시를 준비하며 2년간 칩거했다는 그곳. 아버지는 나를 낳고 고시 공부를 했다는데, 펜을 굴린 건지 나랑 놀아주느라 시간을 굴린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곳엔 금호강으로 흘러드는 맑은 개천이 있었고, 집 앞엔 바둑판식 논이 펼쳐져 있었다.초가집 마당엔 펌프식 수돗가가 있었다.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대면 지하 깊은 곳의 냉기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마중물 한 바가지가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그 지하의 냉기는, 7월의 정오가 내뿜는 지독한 열기에 지쳐있던 아이의 영혼을 단숨에 어루만져 주던 투명한 침묵의 액체였다.
뒷마당의 꽃밭과 앞마당의 큰 감나무들, 그리고 여덟 채 남짓 모여 살던 일가친척들. 그야말로 '응답하라 1983이자,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꿈도 못 꿀 아날로그 공동체였다.
기억 나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봉준호 영화에 나올 법한 캐릭터들이었다. 무섭게 생긴 바보 형 ‘용기’ (용기는 있었으나 지능 스탯을 덜 찍은 비운의 캐릭터), 세 들어 살던 누나 방에 출몰한 초록색 뱀(프로이트가 봤다면 성적 은유라고 했겠지만, 그건 그냥 파충류였다), 그리고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던 동네 형들. 그 형들은 지금쯤 강남 어딘가에서 맨손으로 코인을 잡고 있을까?
해 질 녘, 마루에 앉아 과일을 깎아 먹으며 하늘을 날아가는 왜가리를 보던 풍경. 예쁜 누나도 있었고, 나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얻어먹는 게 일상이었다. 심지어 소 배 밑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어른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소가 주저앉으면 압사당한다는 팩트 폭격. 하지만 소의 뱃살은 푹신했고, 그 위험한 평온함은 마치 주식 시장의 거품 같았다.
그리고 대망의 미스터리, 어머니의 증언.
"그때는 도깨비불도 보고, 불새도 보았단다."
어머니, 잠시만요. 도깨비불까지는 이해한다. 당시엔 나병이나 역병으로 죽어 산에 묻힌 이들이 많았으니, 시신 뼈의 인(P) 성분이 자연 발화해 정전기와 썸을 타면 파란 불꽃이 튈 수 있다. 이과적 감성으로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불새'라니? 이건 좀 곤란하다.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남주작(朱雀)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건가? 어머니가 환타지 소설 작가 지망생이 아니었다면, 이건 필시 착시다.
나는 여기서 셜록 홈즈에 빙의해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습지에서 도깨비불이 둥둥 떠다니다가, 마침 지나가던 왜가리나 기러기의 깃에 잠깐 옮겨붙은 게 아닐까? 밤하늘을 가르는 불타는 새. 그건 전설의 고향이 아니라, 그저 '조류의 재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다른 가설. 왜가리는 몸에서 방수용 분말 즉 분말우(Powder Down))라는 것을 흘리는데, 이것이 노을에 반사되어 붉고 하얗게 타오르는 듯한 착시를 줬을수도 있겠다. 즉 불새는 붉은 노을과 분말우를 흘리는 새의 모습이 빛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착시, 이것이 나의 가장 합리적인 '불새 추정'이다. [참고: '불새'의 과학적 정체? 왜가리가 뿌리는 신비로운 가루 '분말우' 알아보기]
불새라는 종은 없지만 불새라 느낄수있는 순간은 존재하는것이다.
어찌 됐든, 그 시절 우리는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고, 흉터는 많았지만 치유가 있었다. 솥뚜껑에 손을 데고, 리어카에 깔리고, 소 밑에 깔릴 뻔하면서도 살아남은 나. 그리고 불타는 새를 보며 경외감을 느꼈던 어머니.
그 시절의 기억은 '불새'처럼 화려하게 타오르진 않더라도, 도깨비불처럼 은은하게 내 무의식의 늪지대를 떠돌고 있다. 물리적 상처가 남긴 자국이 '하드웨어의 스펙'이라면, 외갓집의 풍경과 전설은 내 영혼에 설치된 '초기 OS' 같은 것이다.
비록 그 불새가 사실은 '불쌍한 새'의 준말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유년의 상처는 훈장이고, 기억은 원래 제멋대로 편집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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