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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파조 박중미 , 나의 뿌리 나의 파조 | 담덕 실록 #01


담덕 실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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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미 이성계 최영

최영·이성계와 함께 개경을 되찾은 정1품 부원군, 조선 건국 제안도 거절한 그 집안의 22세손이 밝히는 진짜 가계도

날씨가 차갑다. 보일러 컨트롤러의 숫자를 쳐다본다. 숫자를 올리는 건 쉽지만, 월말에 날아올 고지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다. 부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펑펑 틀 수 없다. 그저 입김이 나오지 않을 정도, 생존과 생활의 경계선 어딘가에서 적정 실내온도를 타협할 뿐이다.
한기를 느껴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에티오피아 원두를 갈았다. 드르륵, 드르륵. 원두가 갈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입자 단위로 분쇄되는 소리 같았다. 향기가 피어오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족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박혁거세의 몇 대손이라느니 하는, 아득히 먼 신화적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 멀다. 마치 안드로메다은하의 폭발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더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질감이다. 중시조 이후, 진짜 내 피의 흐름을 결정지은 '파조(派祖)'의 이야기다.

할아버지 박중미.

밀직부원군, 그 세련된 이름의 무게

까놓고 말해, 박중미(朴中美)는 그냥 흔한 조상이 아니다. 밀양박씨라는 거대한 숲에는 8개 혹은 12개의 큰 기둥(문화시중공파,좌복야공파 등등)이 있는데, 박중미는 그중 하나인 '밀직부원군파'의 시작점이다.
그는 중시조인 밀성대군 박언침의 15세손이다. 하지만 이런 숫자놀음보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박중미는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했고, 공민왕 시절 홍건적을 때려잡았다. 정확히 공격담당은 아니고 충목왕 수비 담당이지만 말이다. 그 공로로 '밀직부원군'이라는, 입에 올리기만 해도 묵직한 타이틀을 얻었다. 후손들이 "우리는 밀직부원군파야"라고 말할 때, 그건 단순한 분류 기호가 아니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가 그 난세에 한따까리 하셨다"는 역사적 자부심의 발로다.

붉은 두건의 무뢰한들, 그리고 박중미의 등장

홍건적(紅巾賊). 이름만 들으면 무슨 3류 무협지에 나오는 산적 같지만, 실상은 훨씬 더 지저분하고 거대한 재앙이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이 떼거리들은 원나라 말기, 몽골의 말발굽 아래서 억눌렸던 한족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형태였다. 그들의 두목 주원장이 나중에 명나라를 세웠으니, 사실상 '예비 명나라군'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이 왜 남의 땅 고려까지 넘어왔을까? 원나라 관군에게 쫓기다 보니 만주를 넘어 고려까지 밀려온 거다. 밥 달라고 쳐들어온 20만 명의 거지 떼이자 살인귀들. 1361년 2차 침입 때, 개경이 털렸다. 수도가 함락된다는 건, 나라의 심장이 멈췄다는 뜻이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도망쳤다. 국가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들리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박중미가 있었다.
그는 왕의 곁을 지키며 전열을 정비했고, 1362년 1월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개경 탈환 작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그가 받은 '보리공신'과 '밀직부원군'이라는 훈장은, 그저 책상에 앉아 서류 도장이나 찍어서 받은 게 아니다. 피 냄새와 타오르는 개경의 연기 속에서 건져 올린, 진짜배기 훈장이다. [역사 돋보기: 박중미와 고려 어벤져스가 누볐던 '홍건적 격퇴전'의 긴박한 기록 확인하기]

고려의 어벤져스: 최영, 이성계, 그리고 박중미

1362년의 개경.
최영이라는 40대의 듬직한 리더가 있고, 이성계라는 20대의 미친 피지컬을 가진 천재 공격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 곁에 박중미가 있었다. 그는 왕을 호위하며 군의 허리를 지탱하는, 냉철한 참모이자 지휘관이었다.
이 셋은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트리오였다. 재즈 밴드로 치면 최영이 묵직한 베이스를 퉁기고, 이성계가 화려한 색소폰 솔로를 불어제끼고, 박중미가 피아노로 그 모든 화음을 조율하는 형국이랄까. 그들은 '홍건적'이라는 관객 앞에서 최고의 합주를 보여줬다. "우리는 전우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모든 밴드가 그렇듯, 해체는 필연적이었다.

운명의 1388년, 위화도 회군. 그리고 1392년 조선 건국.
이성계는 판을 뒤엎고 새 레이블(조선)을 차려 오너가 되었다. 최영은 "구관이 명관"이라며 버티다 비극적으로 퇴장했다.
그렇다면 박중미는? 그는 조선이라는 새 물결 앞에서 쿨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고려의 신하"라며 벼슬을 걷어차고 낙향했다. 이성계가 스카우트 제의를 했지만 거절했다. 심지어 이성계조차 그 꼬장꼬장한 절의에 감동해, 그가 죽자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치러줬다. 이성계 조차 리스펙트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간지'가 흐르는 삶이었다.

결론: 이것은 단순한 족보가 아니다

커피가 식어간다. 하지만 가슴 속 어딘가는 조금 뜨거워진다.
내가 속한 '밀직부원군파'라는 건, 단순히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첫째, 정1품 부원군이라는 최고위직의 클래스.
둘째, 나라가 망할 뻔한 순간 칼을 들고 나선 전쟁 영웅의 스토리.
셋째, 새 왕조의 유혹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선비의 의리.
넷째, 밀양 박씨라는 거목을 지탱하는 8대 기둥으로서의 무게감.
이건 어디 가서 꿀릴 게 없는 스펙이다. 명품이란 건 로고가 크게 박힌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안감의 바느질까지 완벽한 옷을 말한다. 박중미의 후손이라는 건,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완벽한' 역사적 DNA를 가졌다는 뜻이다.

보일러 온도를 1도쯤 더 올려도 될 것 같다.
이 정도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라면,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다음 달 가스비 고지서가 날아올 때까지만 유효한 허세겠지만 말이다.

나의 족보 가계도

[아래 12개 파의 나열은 "시간 순서대로 생겨난 형제들"이 절대 아니다. 후손들이 관리를 위해 "후대에 정리한 행정 구역"에 가깝다.]

👑 1. 대시조
(기원전 57년 건국)
박혁거세
(약 1,000년 후)
(경명왕의 아들들)
┌──────────────────────┐
│ ※ 중시조 8대군(형제) │
├──────────────────────┤
│ ★ 밀양박 (첫째) │
│ 고령박 / 함양박 │
│ 죽산박 / 상주박 │
│ 전주박 / 순천박 │
│ 경주박 (월성) │
└──────────────────────┘
🏰 2. 밀양박씨 시조
(위 8대군 중 맏아들)
밀성대군
(박언침)
(약 440년 후)
(고려 공민왕 시대)
┌──────────────────────┐
│ 🅰️ A. 밀양박 정통 8대계파 │
├──────────────────────┤
│ 1. 문화시중공파(박언상) │
│ 2. 좌복야공파(박언화) │
│ 3. 밀직부사공파(박양언) │
│ ★4. 밀직부원군파(박중미) │
│ 5. 판도공파(박천익) │
│ 6. 좌윤공파(박을재) │
│ 7. 동정공파(박원) │
│ 8. 정국공파(박위) │
└──────────────────────┘
┌──────────────────────┐
│ 🅱️ 추가 4대 계파 │
│ (8형제의 사촌/친척들)│
├──────────────────────┤
│ 9. 사간공파(박사경 ) │
│ 10. 삼사공파(박윤문 )│
│ 11. 태사공파( 박언부) │
│ 12. 규정공파 등(박현) │
│ (※파벌 분류는 족보 │
│ 마다 다를 수 있음. ) │
일반적으로 정통8대계파+4대계파 추가하여 12파조 혹은 12중조라함.
└──────────────────────┘
⚔️ 4. 밀직부원군파
(박중미) 파조 (정1품, 현대로 치면 국무총리급)
박중미 (44세손)
(朴中美)
│↘ 넷째 아들에서 분파
📜 5. 직계 조상 (조선 중기)
(조선 성종조)
박영손 (朴英孫) (47세손)
[호: 청풍당(清風堂)](종4품,현대로치면 군수급)
(함양 훈도)
(청렴하여 임금께 호를 하사받음)
│ ↘ 넷째 아들에서 분파
🏡 6. 승사랑공파 파조 (분파조)
(밀직부원군파 내 세부 분파)
박 숙 (朴 淑) (48세손)
[호: 청강 / 관직: 승사랑(종9품, 현대로 치면9급~7급 공무원)]
[ 승사랑공파 후손들 ]
(족보 발문에 언급된 나의 문중)

현재 ‘나’는 박혁거세 기준 66세손
밀성대군 기준 37세손
밀직부원군 기준 22세손
승사랑 기준 19세손이다

참고 자료 및 근거

밀양 박씨 밀직부원군파 중조 박중미의 역사적 행적과 가계도 분석 및 사료적 쟁점 고찰

1. 서론: 명문거족 밀양 박씨의 역사적 연원과 밀직부원군파의 위상

한국의 전통적인 성씨 및 본관 체계에서 가문의 기원과 분파 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단순한 혈연적 계보의 확인을 넘어, 당대 정치·사회적 변동과 지배 계층의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료 비판 과정이다. 한국 최대의 단일 본관 인구를 자랑하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원류로 삼으며,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무수한 정치적 영웅과 학자들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밀양 박씨의 방대한 계보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급격한 사회 변동에 조응하여 거대한 분파 체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 체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 바로 8대군(八大君) 및 12중조(十二中祖)라는 고유의 종족적 구조이다.

이러한 12중조의 거대한 줄기 중 한 축을 견고하게 담당하고 있는 가문이 바로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이며, 그 파조(派祖)이자 중조가 바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관통한 죽은(竹隱) 박중미(朴中美)이다. 고려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관료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올랐으며, 국가적 궤멸의 위기였던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당시 무장으로서의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나라를 구한 그의 족적은 다층적인 역사적 함의를 지닌다. 본 보고서는 역사학 및 문중 사료에 기반한 심층적인 교차 검증을 통해, 박중미의 생애와 구국 활동, 밀직부원군파의 상세한 가계도 구조를 해체하고 분석한다. 특히, 사료 간 충돌이 발생하는 성명 한자 표기의 쟁점을 공신력 있는 기관의 학술 데이터를 통해 규명하며, 실묘(失墓) 및 사패지 표석(賜牌地 標石)에 얽힌 구비전승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2. 밀양 박씨 분파 체계의 구조적 분석: 8대군과 12중조를 중심으로

밀직부원군파의 가계적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근간이 되는 밀양 박씨의 거시적 족보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 밀양 박씨의 중시조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30세손으로,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장자이다. 경명왕의 아들들은 각기 다른 대군으로 봉작되어 여러 박씨 본관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되었는데, 이를 전통적으로 '8대군'이라 칭하며 한국 박씨 가문의 거대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왕자 서열

봉작명 (대군)

성명 (휘)

본관 및 분파적 의의

장자 (長子)

밀성대군 (密城大君)

박언침 (朴彦忱)

밀양 박씨 (시조 30세손), 박씨 대종

차자 (次子)

고양대군 (高陽大君)

박언성 (朴彦成)

고령 박씨 중시조

3자

속함대군 (速咸大君)

박언신 (朴彦信)

함양 박씨 중시조

4자

죽성대군 (竹城大君)

박언립 (朴彦立)

죽산 박씨 중시조

5자

사벌대군 (沙伐大君)

박언창 (朴彦昌)

상산(상주) 박씨 중시조

6자

완산대군 (完山大君)

박언화 (朴彦華)

전주/무안 박씨 연원

7자

강남대군 (江南大君)

박언지 (朴彦智)

순천 박씨 연원

8자

월성대군 (月城大君)

박언의 (朴彦儀)

경주 박씨 연원


위 표에서 확인되듯, 밀성대군 박언침은 신라 왕실의 장자 계통으로서 밀양 박씨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이 밀성대군 아래로 세월이 흘러 고려 시대에 이르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크게 현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다시 12개의 거대한 분파가 형성되는데, 이를 '12중조(中祖)'라 일컫는다. 이 12중조에는 규정공파(糾正公派, 박현), 충헌공파(충헌공파, 박척), 태사공파(太師公派, 박언부) 등과 함께 밀직부원군파(박중미)가 포함된다. 조선 시대 이후 양반 사대부 사회에서 가문의 항렬(行列)과 세수(世數)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각 파는 독자적인 족보를 편찬하고 세대별 항렬자를 엄격히 규정하였다. 예를 들어 승사랑공파의 경우 66세 묵(默), 67세 진(鎭), 68세 해(海), 69세 상(相) 등의 오행상생(五行相生)에 기반한 항렬 체계를 유지함으로써 혈연 공동체의 동질성을 수백 년간 지켜올 수 있었다.


3. 밀직부원군파 파조 박중미의 가계도 및 혈통적 연원

박중미가 파조로 있는 밀직부원군파의 직계 조상을 추적해 보면, 고려 초중기 문벌귀족 사회에서 밀양 박씨가 차지했던 확고한 권력 기반을 엿볼 수 있다. 족보와 고문헌의 계보적 기록들을 교차 분석해 보면, 밀성대군 박언침(30세)의 8세손에 해당하는 인물이 고려 문종 때의 명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박언부(朴彦孚)이다. 그는 해동공자로 불리는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중서령과 문하시중, 도평의사라는 고려 최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태사공파(문하시중공파)의 기틀을 다졌다.

박중미는 바로 이 박언부의 8세손으로 기록되며, 그 계보는 고려 후기의 정치적 궤적과 일치하며 세분화된다. 박언부(37세)의 아래 세대에서 형제인 언상(도평의사공파), 언인(복야공파)으로 갈라지며, 언부의 후손은 38세 효신(孝臣)과 의신(義臣)으로 이어진다. 밀직부원군파는 이 중 의신(38세)의 계통에서 파생된 것으로 확인된다. 39세에서는 원(元, 사문진사공파), 윤(允), 임(林), 주(株) 등으로 나뉘며 가문의 외연이 극적으로 확장된다. 박중미는 이러한 명망 높은 문신 가문의 적통을 이어받아 고려 말 45세 전후의 세대에서 밀직부원군파라는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세대수 (시조 기준)

성명 (휘)

관직 및 주요 봉작

분파적 위치 및 의의

30세

박언침 (朴彦忱)

밀성대군 (密城大君)

밀양 박씨 대종의 시원

37세

박언부 (朴彦孚)

문하시중, 밀성부원군

태사공파(문하시중공파) 연원

38세

박의신 (朴義臣)

-

가계의 주요 분기점 형성

39세

박원 (朴元) 등

사문진사 (四門進士)

사문진사공파 분립

40대 중후반 (추정)

박중미 (朴中美)

중서령, 밀직부원군

밀직부원군파 중조 확립

자(子) 세대

박희 (朴熙)

안동부사, 화녕군 (和寧君)

장남, 지방행정 및 가문 수성

자(子) 세대

박해 (朴晐)

대사헌 (大司憲)

차남, 조선 초기 사헌부 수장


후대로 이어지는 가계의 궤적 역시 화려하다. 박중미의 장남 박희는 안동부사를 거쳐 화녕군에 봉해졌으며, 차남 박해는 조선의 검찰총장 격인 대사헌을 역임하며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수군 만호로 참전하여 뛰어난 무공을 세우고, 종전 후에는 《조홍시가》, 《선상탄》, 《누항사》 등 조선 시대 가사문학의 정수를 남긴 대문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가 바로 이 밀직부원군파의 직계 후예이다. 이 가문의 정치·사회적 유전자는 근현대 대한민국 정치사로도 이어져 박주현, 박찬종, 박상희, 박대동, 박재호, 박민식 등 다수의 유력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등 현재까지도 그 역사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다.

박중미의 생애와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변

4.1. 문과 급제와 고려 후기의 정치적 입지

박중미의 관료적 출발은 고려 후기의 전형적인 문벌 사대부의 길을 따랐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재위기인 1344년에서 1348년 사이 과거(문과)에 급제하며 조정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학문적 깊이와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고려 최고의 학술 기관이자 국왕의 자문 기구였던 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다. 이와 더불어 백관을 통솔하는 최고위직 중 하나인 중서령(中書令)에 오르며 당시 무신 집권기 이후 쇠락해 가던 고려의 문치(文治) 체계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2. 제2차 홍건적의 난과 개경 탈환의 군사적 공훈

문신으로서 탄탄대로를 걷던 박중미가 구국의 영웅이라는 역사적 칭호를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1361년(공민왕 10년) 발발한 제2차 홍건적의 난이다. 원나라 체제에 반발하여 일어난 한족 무장 세력인 홍건적 중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수만 명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했다. 서경(평양)이 참혹하게 함락되고, 급기야 수도 개경(開京)마저 유린당하는 국가적 존망의 위기가 닥치자 공민왕은 복주(현재의 안동)로 파천(播遷)해야만 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박중미는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전장을 지휘하는 무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파천하는 왕을 호위하는 동시에, 안우(安佑), 정세운(鄭世雲), 이방실(李芳實), 홍언박(洪彦博) 등 고려 제일의 명장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수립했다. 특히 이 전투에서는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李成桂)가 사병 조직을 이끌고 개경 진입 작전에 참여하여 홍건적을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결사적인 항전 끝에 고려군은 수도를 빼앗긴 지 불과 3개월 만에 개경을 되찾는 기적적인 전공을 세웠다.

난을 완전히 평정한 후, 고려 조정은 박중미의 지대한 군사적, 전략적 공헌을 기려 그를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에 책록하였다. 이어 품계는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마침내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밀직'이란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관장하던 핵심 기구 밀직사(密直司)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가 당시 군권과 정권 모두에서 확고부동한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음을 입증한다.

4.3.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와 왕조 교체기의 사상적 선택

홍건적을 물리치며 구국의 영웅이 된 박중미와 이성계였으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들을 전혀 다른 운명의 길로 인도했다. 이성계는 홍건적 및 왜구 토벌의 공로를 바탕으로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사대부의 수장으로 떠올라 1392년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때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명망 있고 능력 있는 전조(前朝)의 관료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태조 이성계는, 개경 탈환의 전우이자 행정적 역량이 뛰어난 박중미에게 조정을 도와달라며 세 번이나 출사를 간청하는 이른바 '삼징(三徵)'을 단행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중미는 유학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굳은 절의를 지켰다. 그는 이성계의 거듭된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초야에 은둔하며 고려의 충신으로서 야인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결단은 단순한 개인의 고집이 아니라, 조선 건국 과정에서 피를 흘린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들의 도덕적 명분론을 실천한 것이며, 향후 밀직부원군파가 영남 사림의 명문가로서 굳건한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놀랍게도 조선 조정은 새 왕조에 저항한 그를 처벌하기는커녕, 그의 죽음 이후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는 예장(禮葬)을 명하고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이는 조선이라는 새 국가가 충절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체제 유지의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고자 했던 고도의 정치적 포용 정책이자 사상적 승리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사료적 쟁점 고찰: 성명 한자 표기 오류와 정본화 과정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각종 관찬 사료(실록, 고려사 등)와 문중의 사찬 사료(족보, 문집 등) 간에 기록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은 매우 흔한 현상이다. 밀직부원군파 박중미에 관해서도 그의 성명 한자 표기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학술적 쟁점이 존재했다. 여러 문헌이나 웹페이지에서는 종종 그의 이름을 '박중미(朴仲美)'로 표기해 왔다. 한자 '버금 중(仲)'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형제 서열 명명법인 '백(伯)-중(仲)-숙(叔)-계(季)'에서 둘째를 의미하는 보편적인 글자이기에, 후대 학자들이나 서기들이 필사하는 과정에서 관습적인 유추를 통해 '仲'으로 오기(誤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문중에서 수백 년간 목숨처럼 지켜온 세보(世譜)의 기록은 이와 달랐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학술 기관인(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9999_1_0031066)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원전 사료인 『밀양박씨족보(密陽朴氏族譜)』의 기록적 정합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그의 증조부(혹은 본인)의 이름 표기를 '박중미(朴仲美)'에서 '가운데 중(中)' 자를 쓰는 '박중미(朴中美)'로 교정하여 정본화(正本化)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국가 기관이 문중 사료의 독자적 가치와 역사적 정확성을 공인한 매우 중요한 학술적 사례이다.

이러한 정밀한 사료 비판 작업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방대하고 치밀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관록 중심의 역사 서술체계 속에서, 누락되거나 왜곡될 수 있는 개인과 가문의 구체적인 역사를 민간 사료(족보)를 통해 보완하고 완성하는 역사학적 쾌거라 할 수 있다.

문화유산과 구비전승을 통한 역사적 기억의 재구성

6.1. 실묘(失墓)와 묘지석 발굴을 통한 유택(幽宅) 복원

현재 박중미의 묘역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묘봉(妙峯) 마을의 서편 언덕에 유좌(酉坐)의 형세로 안장되어 있다. 배위(配位, 부인)는 전리좌랑대장군(典理佐郞大將軍) 문유의 딸인 부부인(府夫人) 박씨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묘소는 밀양 박씨 12중조 가운데 유일하게 실전(失傳)되지 않고 유택(幽宅)이 보존된 곳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이 묘역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진 과정에는 뼈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전 국토가 왜군의 군화에 짓밟히며 극심한 전란을 겪었고, 이때 박중미의 묘소 위치마저 잃어버리는 이른바 '실묘(失墓)' 사태를 겪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후손들의 끈질긴 추적과 발굴 노력 끝에 땅속 깊이 묻혀 있던 묘지석(墓誌石)을 기적적으로 찾아내었다. 이 묘지석의 명문(銘文)을 해석함으로써 원래의 묘소를 확정 짓고 오늘날까지 수호봉안(守護奉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2. 사패지 표석(賜牌地 標石)에 깃든 항일 구비전승과 민속학적 의미

묘역 입구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밀직부원군 사패지 표석'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민간 설화를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의 집단 심리가 투영된 사회학적 텍스트이다. 공민왕은 박중미의 구국 공훈에 보답하고자 수천 평에 달하는 막대한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했다. 그리고 이 신성한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높이가 무려 6척(약 1.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 네 개를 장승처럼 세우고, 그 중심에 '밀직부원군 사패지 표석(密直府院君 賜牌地 標石)'이라고 깊게 음각하여 권위를 부여했다.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 당시, 마을에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무엇인가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요량으로 이 네 개의 표석 중 하나를 임의로 뽑아내어 눕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불경한 행위 직후, 온 마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괴질이 창궐하고 흉사가 연달아 일어났으며, 눕혀진 표석을 제자리에 원상 복구하고 용서를 빌자 마을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영험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 구비전승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 속에서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과거 외세를 물리친 '민족 영웅'의 징표이자 공동체를 지켜주는 수호신인 표석을 지키려 한 민중의 상징적 저항이었다. 애석하게도 1965년경까지만 해도 제자리를 지키던 이 네 개의 표석들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도로 확장과 농지 개간 등으로 매몰되거나 소실되어, 현재는 산기슭 밭두렁에 단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문화재 보호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6.3. 일제강점기 묘봉재(妙峯齋) 건립의 민족의식적 함의

박중미의 묘역 바로 아래 마을에는 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진 재실인 묘봉재(妙峯齋)가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묘봉산(妙峯山)은 산의 형세가 뾰족하고 기묘하여 명당의 기운이 뭉친 곳으로 유명하며, 재실의 이름 역시 이 산세에서 유래했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웅장한 묘봉재가 건립된 시기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이라는 사실이다.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뿌리째 말살하려던 가혹한 식민 통치기에 후손들이 자금을 모아 거대한 건축물을 올렸다는 것은 혈연 공동체의 결속과 정신을 기리는 거대한 투쟁이었다. 이러한 묘봉재는 근래에 사토(莎土) 등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통해 단장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매년 추향(秋享) 때마다 전국에서 많은 종원들이 모여 제례를 올리고 있다.

7. 밀직부원군파의 후대 계승과 역사적 영향력

박중미가 뿌린 굳건한 충의의 씨앗은 후대 밀직부원군파라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한국 역사 곳곳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가사문학의 최고봉인 노계 박인로는 왜적의 총탄에 맞서 바다를 지켰던 참전 무장으로서 《선상탄》을 지었고, 궁핍한 삶 속에서도 선비의 기개를 노래한 《누항사》 등을 남겼다.

이러한 가문의 역동성은 현대 대한민국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박주현, 박찬종, 박상희, 박대동, 박재호, 박민식 등 다수의 저명한 국회의원과 장관 등 유력 정치인들을 대거 배출함으로써 현재 진행형으로 한국 사회의 리더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8. 결론

고려와 조선의 격동기를 가로지르며 명문 밀양 박씨의 핵심 분파를 형성한 밀직부원군파 중조 박중미의 생애, 가계도, 사료적 쟁점, 그리고 관련 유적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입체적으로 조명해 보았다.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주요한 통찰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박중미는 개경을 탈환하여 국가의 존립을 연장시킨 실존적 구국의 영웅이었으며, 그가 실천한 '불사이군'의 절의는 후대 영남 명문가로서 철학적,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원이 되었다.

둘째, 사료 비판의 영역에 있어 그의 한자 성명 표기가 '박중미(朴仲美)'에서 '박중미(朴中美)'로 교정된 사례는 문중 족보 기록이 갖는 사료적 적확성을 국가 학술 기관이 공인한 중요한 사건이다.

셋째, 청도 묘봉 마을에 전승되는 박중미 묘역의 실묘와 복원 서사, 그리고 사패지 표석과 묘봉재에 얽힌 내력은 외세의 침탈 속에서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공동체의 토착 질서를 수호하려 했던 조선 민중들의 집단 무의식이 투영된 민속학적 유산이다.


1. http://www.milseongpark.com/html/01/03.php (8대군 및 12중조 - 밀성박씨 좌상공파)

2. https://cafe.daum.net/parkwoohyunfamily/8J9W/3 (시조에서12중시조까지의계보 - 밀양박씨에대한지식 - Daum 카페)

3. https://m.cafe.daum.net/cdmhsm/W89n/88?listURI=%2Fcdmhsm%2FW89n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5)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

4. http://www.chungheongong.com/(A)/A-4/s5.htm (박중미[朴中美])

5. https://m.cafe.daum.net/cdmhsm/W89n/88?listURI=%2Fcdmhsm%2FW89n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85) 밀성 박씨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

6. https://cafe.daum.net/parkwoohyunfamily/8J9W/3 (시조에서12중시조까지의계보 - 밀양박씨에대한지식 - Daum 카페)

7. http://www.mundo-gong.co.kr/htm/gyebo/gyebo01.htm (밀양박씨 12 중시조)

8. https://namu.wiki/w/%EB%B0%80%EC%96%91%20%EB%B0%95%EC%94%A8 (밀양 박씨 - 나무위키)

9. https://namu.wiki/w/%EB%B0%80%EC%96%91%20%EB%B0%95%EC%94%A8 (밀양 박씨 - 나무위키)

10. https://ko.wikipedia.org/wiki/%EB%B0%80%EC%96%91_%EB%B0%95%EC%94%A8 (밀양 박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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