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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리뷰: 평생직장 잃은 이병헌의 잔혹한 분재학, 서늘하고 불쾌한 블랙코미 | 비평과 비명사이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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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다

새벽 5시. 젖병의 온도는 사람의 체온과 비슷하게 맞춰져 있었다. 아이는 다시 잠들었지만, 내 안의 어떤 스위치는 딸깍, 하고 켜진 채 꺼질 줄을 몰랐다.

고요한 주방에서 식어가는 머그잔을 노려보다가 결국 거실로 나와 넷플릭스를 켰다. 박찬욱 감독이 필생의 프로젝트라며 내놓은 <어쩔 수가 없다>.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누른 건, 어쩌면 이 불면의 끈적한 새벽을 무언가로 예리하게 썰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분재와 살인의 우아한 변주곡

영화 속, 25년간 제지 회사에 뼈를 묻은 평범한 사내 만수(이병헌)는 해고라는 벼랑 끝에서 기괴한 결론에 도달한다. '경쟁자들을 제거해야 내가 취업할 수 있다.'

이 영화엔 치고받는 땀내 나는 액션 따위는 없다. 대신 만수가 평소 애지중지 다듬던 '분재 기술'이 차갑게 식은 시체 위에 정교하게 적용된다.

살인과 완전범죄를 묘사하는 그 치밀한 디테일과 집중력, 그리고 그 섬뜩한 정육점의 풍경을 아들이 무심코 지켜보게 만드는 서늘한 연출까지. 스크린 속엔 박찬욱 특유의 냉소적인 미장센이 압도적으로 흐른다.
특히 선출과 만수가 맞붙는 장면은 기가 막힌다. 스프링뱅크 15년산의 짙은 피트 향과 매캐한 시가 연기가 뒤엉키는 가운데, 뺀치로 자기 강냉이를 서슴없이 뽑아버리는 광기. 그 지독한 블랙코미디의 한가운데서 마치 두 마리 짐승이 연기 대결을 펼치듯 폭주하는데, 나도 모르게 선출이 뱉어내는 “졸ㄹ ㅏ 멋있어"라는 말에 동조하고 말았다. 둘의 에너지는 스크린을 찢어발길 듯 폭발한다.

억지 철학이 빚어낸 불쾌한 촌극하지만 스프링뱅크의 독한 향이 날아가고 나면, 지독한 숙취 같은 찝찝함이 밀려온다. 까놓고 말해서, 경쟁자를 죽여야 내가 뽑힌다는 이 영화의 기본 세팅은 존나 어이가 없다.
나 역시 평생직장 따위는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걸 뼛속까지 알며,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헐떡이며 살아왔다.

온 국민이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영화는 존재하지도 않는 고지식한 양극단 중 하나를 관객에게 강매한다. 생존의 비극? 무한 경쟁의 비정함? 아니, 이건 감독이 자신의 철학을 억지로 쑤셔 넣기 위해 만든 작위적인 모래성이다.

설정부터가 기분 나쁜 블랙코미디이며, 내 불쾌감이 우선순위를 점령해버린 이상 아무리 연기가 훌륭해도 높은 평점은 도저히 줄 수가 없다.

자중해라 해병대, 그리고 승원이 형이 억지스러운 촌극 속에서 희생되는 캐릭터들을 보면 헛웃음이 진동을 한다.
"나 해병대 출신이야! 총 줘!"라며 나대던 놈이 결국 상황이 꼬여 자기가 죽음의 타겟이 되어버리는 꼴을 보라.

왜 미디어는 틈만 나면 해병대를 희화화의 제물로 쓸까? 어쩌면 이 시대 해병들이 사회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사회 나왔으면 오버액션 좀 하지 말고, 나대지 말고 제발 자중해라"라는 통렬하고 서늘한 조롱.
그리고 또 한 명의 실직자, 시조 역의 차승원.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던 그는 만수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졸지에 '분재 시체'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프로의 세계라지만, 승원이 형은 대체 왜 이 자리에 낀 걸까? 무명 배우가 맡았어도 충분히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배역이었는데, 굳이 평생 박제될 필모그래피에 이런 뻘짓을 남기다니 큰 후회가 될 듯하다.

형, 거긴 형이 낄 자리가 아니었어. 앞으로 작품 선택 좀 자중해, 응?

콘돔과 제지의 아찔한 간극이 난장판을 통틀어 가장 골 때리는 헛웃음 포인트는 범모와 아라의 씬에 있다. 불륜을 저지르는 아라를 본 범모의 현실과 붕 뜬 연극스러운 몸짓의 오버액션도 웃기지만, 압권은 아라의 회상 씬이다.
범모가 아라를 꼬시며 끈적하게 뱉었던 대사. "아라 씨 입술은 최상급 오카모토보다 부드럽습니다, 흐흐." 그걸 회상하던 걸 본 범모가 어이없다는 듯 정정한다. "오카모토는 콘돔이고, 아키모토(최고급제지)야." 콘돔과 특수지 브랜드의 차이도 모르는 여인의 어설픈 회고.

결국 아라는 만수와 어찌저찌 공범이 되어 경찰의 의심을 유유히 벗어난다. 그 기괴한 연대기라니.

정의는 없다, 오직 공범들의 심야식당뿐

새벽 7시,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동이 터오지만 입안의 모래알 같은 감각은 가시지 않는다.
이 영화가 던지는 시사점? 인간성의 상실? 웃기는 소리. 결론은 명확하고 끔찍하게 심플하다. 정의는 없다. 모두가 공범일 뿐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타인을 짓밟고, 손에 묻은 피를 서로 핥아주며 태연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괴물들의 연대.
나는 굳게 닫힌 넷플릭스 검은 화면을 잠시 노려보다가, 차갑게 식어버린 빈 젖병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기분은 찝찝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의 민낯은 원래 뭣같이 굴러가고, 나는 어김없이 아이의 분유값을 벌기 위해 출근이라는 생존 게임에 뛰어들어야 하니까.

박찬욱 감독 인터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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