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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따먹기:지우개는 지우는 물건이 아니었다 | 담덕 실록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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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레슬링

어머니가 사주신 빳빳한 내 첫 지우개는, 옆자리 녀석의 호주머니 속으로 증발하는 데 채 3초가 걸리지 않았다.

국민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의 일이다. 나는 세상의 법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동네 골목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접은 종이딱지로 치고받던 시절은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밑천이 털려도 패배의 씁쓸함만 탁탁 털어낸 뒤, 집에 돌아가 폐종이박스나 신문지를 북북 찢어 다시 접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교실이라는 공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입학 기념으로 어머니가 정성스레 쥐여준 점보(Jumbo) 지우개. 그것은 온전한 내 자본이 투입된,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될 실물 자산이었다. (링크)

나는 그것을 매끄러운 책상 위에 올렸다. 상대는 넓적하고 거대한, 마치 소비에트 연방의 중전차 같은 지우개였다. 얼핏 내가 유리해 보였지만, 내 점보는 튕겨 나갈 뿐 도무지 그 거대한 평원 위에 올라타지 못했다.

결국 녀석의 전차가 내 점보를 기어코 덮쳤을 때. "아싸!" 하는 짧은 비명 같은 환호와 함께 내 지우개는 녀석의 호주머니 속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갔다. 나는 인류 역사상 그렇게 빠른 손놀림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입학한다고 어렵게 구해준 나의 소중한 학용품이, 합법을 가장한 도박판에서 허무하게 소멸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주식 계좌를 트자마자 하한가를 맞고 상장폐지까지 당해버린, 내 생애 첫 '깡통 계좌'의 서늘한 감각이었다. 당혹감은 척추를 타고 올라와 뒤통수를 때렸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깨닫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코흘리개들의 귀여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교실 뒷자리는 나름 월스트리트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합법적 약탈'을 배우고 있었다.

단순히 잘 지워지는 본연의 기능 따위는 개나 줘버린 지 오래였다. 도약을 위한 하이골드의 탄성, 호구를 낚기 위한 향기 지우개의 미끼 상술, 기하학적인 변칙 기동을 자랑하는 로봇 모양 지우개까지. 게다가 이기고 싶다는 맹목적인 욕망은 아이들을 미치광이 기술자로 만들었다. 바닥에 스테이플러 심을 촘촘히 박아 중력을 조작하고, 침을 발라 마찰계수를 통제하는 음습한 불법 튜닝들. 선생님이라는 거대한 공권력의 단속을 피해 가며, 우리는 매일같이 날것의 자본주의와 야생의 밑바닥 룰을 창조해 내고 있었던 거다. 졸라게 심오하고, 소름 끼치도록 진지한 스트리트 파이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는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유리 액정이나 문지르며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피드를 삼키며, 주어진 시스템에 순한 양처럼 복종한다. 하지만 진짜 통제는 그런 게 아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지우개라는 묵직한 '물성'을 통해 세계의 중력과 마찰을 손끝으로 직접 만졌다. "이건 선 넘었으니 인정 안 돼!", "웃기지 마, 반은 걸쳤어!"라며 핏대를 세우고 싸웠다. 약관에 영혼 없이 '동의' 버튼만 누르는 현대의 바보들과 달리, 우리는 현장에서 피 튀기는 협상과 타협으로 우리만의 '로컬 룰'을 세우는 딜러들이었다.

지우개를 따먹히면 내 소유권은 영원히 박탈당한다. 진짜 상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실의 뼈아픈 슬픔을 씹어 삼키며, 결핍을 창의적인 '해킹'으로 극복해 냈다. 딱딱하고 지루한 억압의 공간이었던 책상은, 우리의 손가락 튕기기 한 번에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콜로세움으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우주를 만들어내던 짐승 같은 열정이었다.

그러니 효율이라는 단어에 취해 편함만 추구하면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텅 빈 공허함에 시달리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이토록 손때 묻은 진심을 걸어본 적이 언제인가? 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좁은 우주를 향해 내던지듯 손가락을 튕겨본 적이 도대체 언제냐는 말이다. 쫄지 마라. 빼앗긴 지우개는 문방구에서 다시 사면 그만이지만, 당신이 잃어버린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야성은 로켓배송으로도 절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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