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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르망에서 마주한 은하수 이불 | 담덕 실록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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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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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해산물이 싸서? 아니면 기름 유출의 비극을 동정해서? 둘 다 틀렸다. 내가 태안이라는 공간에 꽤 집착하는 이유는, 90년대의 어느 여름날 내 발바닥을 무참히 찢어놓았던 굴껍질과 르망 자동차의 퀴퀴한 시트 냄새, 그리고 폭력적일 만큼 쏟아지던 은하수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잠자는 시간마저 쥐어짜내기 전, 우리는 완벽한 어둠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다. 태안의 만리포는 내게 그 잃어버린 권리를 증명하는 영수증 같은 곳이다.사람들은 힐링을 위해 바다를 찾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짜 바다는 인간을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압도할 뿐이다. 아버지를 따라간 갯바위 낚시. 르망 곁에 돗자리를 깔고 비박하다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때, 천장 대신 마주한 것은 우주라는 거대한 심연이었다. 어린시절 처음 본 은하수는 거대한 그물이 아니라, 나라는 미물을 덮는 포근한 이불에 가까웠다. 도심이라는 거대한 네온사인 무덤에서 우리는 '빛 공해'니 '수면 장애'니 하는 고상한 단어로 불평을 늘어놓지만, 실상 우리가 잃어버린 건 시력이 아니라 짐승 같은 야성의 감각이다. (전 세계 빛 공해 지도)

초 단위로 새로고침되는 스마트폰의 타임라인을 벗어나, 수억 년 전 폭발한 항성의 잔해를 맨눈으로 직접 받아내는 일. 그것은 자본주의의 '빨리빨리' 쳇바퀴에 우아하게 한방을 날리는 무용한 사치다. 이 무위의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갉아먹는 번아웃에 대한 가장 통쾌한 복수인 셈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절 만리포는 지금처럼 완벽한 해변은 아니었다. 테트라포드가 해변을 점령하고있었는데 맨발로 테트라포드를 타다 굴껍질에 발바닥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나는 아버지를 속으로 꽤나 원망했다. 하지만 며칠 걷다 보니 발바닥에 굳은살이 배겨 아무렇지 않게 바위를 타게 되더라. 인간이란 참으로 소름 끼치는 적응의 동물이다. 상처가 무뎌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른이 된다는 뻔한 변명 뒤에 숨어, 나는 지금도 삶이 내 발바닥을 찌를 때면 도망치듯 태안을 떠올린다. 태안에 가면 내 마음도 좀 '태연'해질까 해서.

태안의 새벽 별은 낭만적인 엽서 풍경이 아니라,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우주의 멋진 감시 카메라다.

다시 태안에 가야겠다. 타인의 시선과 SNS 알림 따위는 모두 소거하고 그 완벽한 고립 속으로. 지방 소멸을 떠드는 시대에, 태안은 그곳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압도적인 정서적 사치를 묵묵히 내어주고 있다. 나는 아무런 생산성 없는 고요함을 한껏 들이마실 것이다. 굳은살 박인 맨발로 다시 한번 차가운 바위를 디디며, 파도 소리를 BGM 삼아 수억 년의 시간을 건너온 빛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견뎌내고 싶다. 어쩌면 그것만이, 이 고장 난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리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일지도 모르니까.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챙기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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