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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과 연합고사의 추억, 학창시절 나의 성적표가 낙인찍은 천재와 둔재 | 담덕 실록 #09


담덕 실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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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고사와 수능

환영과 컨베이어 벨트

나는 오랫동안 내가 무언가를 위해 내 두 다리로 달리고 있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서야, 그 빌어먹을 트랙 위에서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뛴 적이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저 정교하게 설계된, 아주 거대하고 우아한 도축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나란히 서 있었을 뿐이다. 등급 판정을 기다리는 고깃덩어리들처럼. (대한민국 고교 입시의 역사와 비평준화 시절의 기록)
OMR 카드를 새까맣게 칠하던 수성 사인펜 자국은 사실 우리 이마에 새겨지는 바코드였다. 1등급 한우부터 등외품 폐기물까지 인간을 부위별로 분류하기 위한, 사회라는 기득권이 만들어낸 꽤나 지독하고 정교한 개수작. 그것이 내가 통과해 온 학창 시절의 본질이었다.

연합고사,200점짜리 톨게이트


1990년대의 비평준화 지역. 그곳은 이상하고도 폭력적인 세계였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200점 만점짜리 '연합고사'라는 거대한 톨게이트가 버티고 서 있었다. 안양고, 평촌고, 수성고, 교사인 아버지가 동료들 앞에서 헛기침을 하며 세울 수 있는 알량한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선 최소 160점이라는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세계의 기준에 부합하는 재능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내 점수는 130점. 그것은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자랑할 수도 없는', 지독하게 미지근하고 애매한 온도의 숫자다.

수능이라는 5지선다의 세계도 매한가지다. 5개의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행위. 그것은 복합적인 사고력이나 인간 고유의 창의성을 묻는 숭고한 과정이 아니다. '출제자라는 권력의 의도에 얼마나 빠르고 고분고분하게 복종할 수 있는가', 혹은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는 기계로 거듭났는가'를 측정하는 얄팍한 충성도 테스트에 불과하다. 이 시스템은 10대 시절의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간의 이마에 '천재'와 '둔재'라는 낙인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찍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했다.

나는 명문대라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빛내주기 위해 완벽하게 사육된, 가장 모범적이고 애매한 '들러리'였다.

53등 광어의 진자 운동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가 학교라는 기관으로부터 받아낸 종이쪼가리라고는 '개근상'과 '정근상'이 전부였다. 그건 내가 이 거대한 시스템에 하루도 빠짐없이 순종적으로 몸을 뉘었다는, 일종의 성실한 '가축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성적과 관련된 상은 단 한 번도 내 곁을 스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학창 시절에도 일종의 시스템 버그, 이상한 우주적 오류 같은 순간이 딱 한 번 존재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한국일보 글짓기 대회 은상. 당시 동네마다 하나씩 있던, 어린애들 목에 핏대를 세우게 만들던 '웅변학원'이라는 기괴한 인큐베이터에서 주워들은 잡다한 스킬들이 빚어낸 뜻밖의 쾌거였다.

상장을 나눠주던 날의 그 서늘한 공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교단에 선 선생은 그 은상 상장을 들고 마치 폭발물이라도 쥔 것처럼 당혹스러워했다. 선생의 시선은 허공을 갈라, 학급의 절대적 우등생이었던 '보경'이라는 이름의 소녀와 나 사이를 어지럽게 횡단했다.

'도대체 왜 이 주위 산만한 불량품 자식이 이 상을 타가는 거지?'

선생의 얼굴엔 그 노골적인 불신이 활자처럼 적혀 있었고, 완벽한 모범생 보경이의 눈동자 역시 처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의 찌푸린 미간과 보경이의 당혹스러운 표정. 그것이 내가 그 오만한 시스템에 가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하고도 통쾌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그 유일한 은상의 반짝임을 뒤로하고, 내가 6학년 때 60명 중 4등을 하고 중학교 때 10등 안팎을 맴돌았던 건 내 안의 어떤 위대한 학구열이 불타올라서가 아니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서늘한 압박과 어머니의 숨 막히는 조임이 만들어낸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을 뿐이다.

명문고에서 밀려나 들어간 중상위권의 동안고. 입학 후 첫 시험에서 '55명 중 53등'이라는 낯선 숫자를 받아 들었을 때, 나는 세계의 끝에 홀로 선 기분이었다. 고만고만한 놈들이 모인 수조 속에서도 나는 바닥을 핥는 넙치였다. 나의 재능 없음을 인정할 수 없어 발버둥을 쳤고, 고3 때까지 15등 안쪽으로 나를 끌어올렸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수능 모의고사 점수는 400점 만점에 늘 250점에서 290점 사이를 진자 운동했다. 인서울의 끝자락, 단국대 체육교육과라도 가려면 300점이라는 벽을 넘어야 했지만, 내게는 그 10점을 뛰어넘을 폭발력도, 진짜 내가 원해서 한다는 목적의식도 없었다. 재수를 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 수능을 봤을 때 점수가 오히려 더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묘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아, 나는 애초에 인서울의 궤도에 오를 수 없는, 철저하게 애매한 중력장을 가진 소행성이었구나. 나는 그저 훗날을 위한 '간판'이라는 관성과 부모님의 '체면'이라는 가짜 궤도를 돌고 있었을 뿐, 내 안에는 나를 쏘아 올릴 어떤 로켓의 동력도 없었던 거다.

창밖을 보던 그들의 행방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든다. 마치 잘 짜인 추리소설의 마지막 장처럼.

25년이 지난 지금, 이 끔찍하고 획일화된 5지선다의 폐허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남은 자들은 누구일까? 내 기억의 서랍 속에는 몇몇 얼굴들이 남아있다. 5지선다 정답은 죽어라 못 찍어내면서도,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엉뚱한 질문으로 선생들의 뒷목을 잡게 하던 녀석들. 과거 국민학교 시절, 선생의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던 내 '글짓기 은상'의 순간처럼, 당시의 잣대로는 철저히 둔재 혹은 이단아로 분류되었던 그 유쾌한 불량품들 말이다.

어쩌면 진짜 정답은 OMR 카드의 여백에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스템은 우리를 1번부터 5번 사이의 좁은 감방에 가두려 했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5개의 보기가 아닌 창문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과거의 잣대가 유통기한을 다해버린, 무엇이든 잣대가 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다원의 시대. 이 거대한 5지선다형 사기극의 끝에서 진짜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가끔 차가운 캔맥주를 딸 때마다, 궤도를 이탈해버린 그 애매하고도 창조적이었던 친구들의 행방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묘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다가올 세계를 열어젖힐 마스터키는, 3번과 4번 사이에서 기꺼이 길을 잃었던 그들의 구겨진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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