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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포해수욕장 캠핑장과 쾌적하게 즐기는 노하우 | 유목적 시선 #07

해병대 유격교육대 생존기와 군대 계급사회 생존 테크트리 | 담덕 실록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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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덕 실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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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유격장

뷰파인더 너머의 붉은 명찰: 90미터 외줄 위에서 증명한 어느 보편적 광기에 대한 회고록

어쩌면 세상은 거대한 옥타곤일지도 모른다. 가끔 맥주 캔을 손에 쥐고 UFC 경기를 보다 보면, 길로틴 초크나 오블리크 킥처럼 단숨에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실전적인 기술들에 기묘한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반면 UDT SEAL 요원들이 대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화려한 나이프 컨트롤을 선보일 때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저게 과연 피가 튀는 실전에서 먹힐까?' 하는, 지극히 건조한 의문이 카메라 뷰파인더의 초점을 맞추듯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다.

해안 경계 시절, 이름 모를 일병이 위탁가서 어디선가 배워와 가르치던 '무적도' 역시 비슷한 맥락의 코미디였다. 턱을 치고 목을 치고 야전삽으로 찍는 동작 자체는 그럴싸했지만, "무! 적! 이~야~아~앗!"이라는 구호와 함께 가라데 품새 비슷한 엉성하게 흉내 내는 그 살상 동작들을 따라 하고 있노라면, 마치 삼류 액션 영화의 엑스트라가 된 것 같은 지독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보기에 진짜 증명은, 화려한 품새가 아니라 흙먼지 구르는 수천 번의 겨루기와 진흙탕 싸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무적도

그리고 인간 군상의 그 진흙탕 밑바닥을 가장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곳, 이 사람이 진짜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실험실은 바로 군대다. 법무법인의 서류 더미와 카메라 뷰파인더 사이를 오가는 기묘한 칵테일 같은 삶을 살아봤던 지금도, 나는 종종 2001년 포항의 그 뜨겁고 비릿했던 공기를 호흡하곤 한다. 그것은 내가 겪어낸 가장 잔혹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인간성에 대한 거대한 사회 관찰기였다.

수술대 위에서 증명해야 했던 생존, 그리고 33대대

2001년, 해병대 1사단 예하 33대대 9중대. 이른바 킹콩 연대의 유격대대로 실무 배정을 받았을 때의 공기는 낯설고 기만적이었다. 850자 기수 전후, 해병대는 소위 '민주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사정 정국을 통과하고 있었다. [1]

대대적인 폭행 근절 지시로 여러 명이 영창을 다녀온 직후였다. 옆 동네인 2연대나 7연대 녀석들은 우리를 보며 "3연대는 이제 흘렀다. 나가리 연대다"라며 조롱했다. 대놓고 구타하는 일은 사라졌지만, 지옥은 물리적 타격에서 심리적 가스라이팅으로 교묘하게 진화해 오고 있었다. 영창을 다녀오거나 전역을 앞둔 선임들은 제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중간 기수들을 압박해 아랫사람들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1]

나는 그곳에서 이병 시절을 보냈다. 낮에는 완전 군장을 멘 채 타는 듯한 사단 아스팔트 위를 달렸고, 밤에는 '코골이'라는 생리 현상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병의 손에 맞아야 했다. 생리 현상을 기합으로 다스리는 이 모순 속에서, 나는 가장 편안해야 할 휴가 기간에 수술대 위로 올라가 코골이 수술을 받았다. 부대로 복귀해서 또 맞지 않으려면, 내 몸의 구조를 뜯어고쳐야만 했다. 28개월 된 아이가 밤중 수유를 끊을 때의 칭얼거림조차 안쓰러워 안절부절못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 시절 수술대 불빛 아래서 느꼈던 스무 살 청년의 처절한 고립감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해안 경계에도 투입되었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 광기가 온 나라를 덮었을 때, 상근 병장의 리드로 초소 앞 민간인이 보여주는 작은 TV 화면으로 월드컵을 보려다 평소 고분고분하던 대학 레슬러 출신 소대장에게 걸렸다. 그는 하이바를 쓴 내 머리를 풀파워로 수십차례 가격했다. 영창에 가기 싫으면 초소부터 내무반까지 왕복 4km를 완전 군장으로 오가며 일주일 내내 반성문 스타일 깜지를 쓰라고 했다. 특수 훈련도 아니고, 명예로운 기합도 아닌, 수면을 철저히 박탈당한 채 4km 왕복 후 잉크를 채워 넣는 영혼의 노가다. 웃기는 건, 똑같은 잘못을 하고도 상근 예비역 병장은 시간이 되면 유유히 퇴근해 집에서 쉬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남들은 추억하는 2002년의 시기가 나에게는 누구에게도 말못하는 최악의 훈련도 아닌 영창도 아닌 육체 한계 테스트의 시기를 건너고 있었다

보통은 해안경계때 근무들어가면 선임들이 싸가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어떤 선임은 프랑스 외인부대에 가겠다며 허세를 떨다가, 내가 조금이라도 풀어진 듯하면 실탄이 지급된 총에서 순식간에 "철컥"하는 소리로 장전을 하여 첫 공포탄을 빼고 진짜 실탄으로 나를 쏘려는 시늉을 했다. 그게 싸이코 연기였는지 진심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이병이었던 나는 속으로 오만가지 공포를 삼키며 "똑바로 하겠습니다!"라고 관등성명을 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33대대, 민주화라는 가면을 쓴 채 음습한 똥군기가 난무하던 나의 첫 번째 세계였다.

폭력의 진화와 밸런스의 붕괴가 낳은 괴물들

군대라는 공간은 태생적으로 인격과 자유가 제한된 채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민간 사회 수준의 '과도한 인격'을 찾는 것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모순이다. 밸런스가 중요하다. 하지만 2001년의 해병대는 그 밸런스가 박살 나기 시작한 과도기였다.

직접적인 폭력이 사라지자, 그 진공 상태를 채운 것은 '건강한 군기'가 아니라 '은밀한 가해'였다. 내 기억상 그때까지는 아직 ‘기수열외’라는건 존재하지않았다. 요즘 신종 가혹행위 ‘기수열외’라는건 때리는 건 증거가 남아서 영창을 가니, 후임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말려 죽이는 방법으로 심리적 말살이 자행되고 있는것이라 추정된다. 당시 2연대가 사단에서 '야지(보조 구호)'를 넣으며 싸가를 부르며 폭발적인 에너지로 해병대의 야성을 뽐낼 때, 3연대는 겉으로는 민주적인 척 정식 군가만 부르면서, 속으로는 후임을 사주해 아랫기수를 때리게 만드는 얍삽한 정치판으로 전락했다. 
병역 폭력의 양상

또한 돌격 정신이나 '악기'의 원천이 폭행과 정신 교육에 따른 에너지의 분출구라는 생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폭행에 억눌린 스트레스가 훈련장에서 광기로 터져 나오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 '실력에 기반한 자부심'이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군대는 그저 성질 더러운 꼰대들의 수용소로 전락하고 만다. 내가 33대대에서 목격한 것은 바로 그 더러운 연료(폭력)가 떨어져 가며 엔진이 덜컹거리는, 우스꽝스럽고도 잔인한 군상의 민낯이었다.

2001년 당시 해병대 1사단의 편제와 환상 속의 벽암지

- 1사단 예하 소총 연대의 진실: 당시 1사단의 대대별 특성화 편제는 '1대대-공수, 2대대-기습, 3대대-유격'이라는 공통된 퍼즐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61mm 와 K-4를 다루는 화기중대가 결합되어 대대의 화력을 책임졌다.

- 급속 행군의 미학: 33대대는 타 연대에게 흘렀다고 조롱받았지만, 완전 군장 상태로 야간에 밀어주고 끌어주며 부대 전원이 12km를 1시간 30분 사이에 주파하는 꽤 나이스한 하체와 심폐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없이 지면을 짓누르며 달리는 그 압도적인 침묵의 에너지가 바로 유격대대의 진짜 '멋'이었다.
당시 1사단 편제

- 벽암지 유격장의 배신: 훈단 시절 지원한 유격 조교로 선발되어 벽암지로 전출을 갔다. 소규모 20명 남짓이니 가족적일 줄 알았으나 완전한 오판이었다. 겉으로는 일병에게 젓가락 사용을 허락하고 특수 산악화를 지급하며 엘리트 대우를 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최악이었다. 전출을 왔다는 이유로 군번이 리셋되어 이병 시절로 돌아가 주계 작업, 위병소 불법 연장 근무, 잔디 깎기, 교장 보수, 선임들의 다림질과 빨래까지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하는 24시간 감시 체제의 지옥이었다. 교관1명 선임조교2명이서 한명의 조교 를 양성하는 유격 조교교육 훈련 강도는 대대에서 받았던 교육과는 질과 강도에서 차원이 다르게 강했다. 시작20분만에 영혼까지 다 털리고 탈진상태로 계속 진행되는 방식은 훗날 수색교육 수료한 동기가 와서 교육받다가 낙오 하는것을 수차례 볼 정도였으니 가늠하기 힘든 강도였다. 게다가 조교 교육 후에 오후 내무실 막내 생활까지 같이 들어간다.

이건 여럿이 섞여 버티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계속 매순간 결과를 증명해야 하는 구조였다.
문제는 그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무생활까지 이어지면서 회복 없이 계속 깎여나갔다.
돌이켜보면, 그건 휴식이 없는 소모 루프에 가까웠다.

뭐랄까, 단순 버티는 훈련이 아니라 높은 밀도로 계속 증명해내야하고 비공개 훈련인 만큼 유격장 특유의 거친 곤조를 선임들에게서 필터없이 받아내는 훈련이었다. 오전에 18kg사낭 메고 부대밖 산악 구보 코스별 하나하나 마스터해가고 이후 유격장 들어와서 등반,레펠,외줄,메듭법 등등 코스별 무한대의 강도로 2:1개인 교육으로 진행된다.

한마디로, 길게 버티는 훈련이 있고, 계속 증명해야 하는 훈련이 있다면 내가 겪은 건 후자였다.

유격조교의 현실

35미터 상공에서 내리꽂은 통쾌한 복수극

가만 생각해보면 전출오기전 33대대 시절 과도기적 군번에게도 축복은 있었다. 민주화 조치 덕분에 이병, 일병들도 훈련에서 배제되지 않고 대대 내 육·해·공(IBS, 공수, 유격) 기초 교육을 모두 이수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사단 체육대회나 행사때는 머리위로 SPIE(Special Patrol Insertion/Extraction, 특수침투 및 철수)웻수트 입고 오리발찬 수색대원이 헬기에 메달려 사단 위를 날아다니고, 위장 크림을 시커멓게 바르고 근육질 선임들을 필두로 연병장에 드러누워, 단체로 "악! 악!" 구령을 넣으며 타 부대의 기를 꺾어버리던 총력전의 짜릿함은 지금도 필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내 군 생활의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벽암지의 36도 폭염 속에서 완성되었다. 7월의 살인적인 더위.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 탈진해 구역질을 하면서도 30m 절벽에서 수십 번씩 전면 레펠로 뛰어내렸다. 흔들리는 외줄 위에서 "당해봐라"며 줄을 요동치게 만드는 선임들의 악의적인 흔들림 속에서도,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똑바로 하겠습니다!"를 외쳤다. 오직 살아서 사회로 나가겠다는, 한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생존 본능 중 하나였다.

그리고 조교 교육 수료의 마지막 코스. 나는 90미터 외줄을 2분 20초 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주파해 버렸다. 조교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였다.

이후 33대대가 유격장으로 위탁 교육을 왔을 때의 그 장면은, 내 인생중 가장 완벽한 블랙 코미디였다. 코를 곤다며 일병을 시켜 나를 때리게 만들고, 실탄으로 나를 쏘는 시늉을 하던 그 윗선임들. 바보 같던 그 이병이 번쩍이는 산악화와 빨간 모자를 쓴 수퍼 조교가 되어 그들 앞에서 30m 절벽을 뛰어내리고 90m 외줄을 타는 '인간 병기'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자, 그들은 보복이 두려웠는지 대열 맨 뒤로 숨어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굳이 입을 열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다.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는 가장 비겁한 자들이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미 해병대(USMC)와 UDT가 입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기를 걸며 첨단 장비를 쓰던 미군들이나, 냉장고를 기부할 정도로 예산이 빵빵하고 차분하게 학원처럼 교육을 받던 UDT 요원들 앞에서도 나는 당당하게 시범을 보이고 인솔하였다. 그 정예 요원들이 로프타는 날 보며 꽤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을 때, 나는 비로소 33대대에서의 그 모든 수모가 완벽하게 세탁되는 짜릿함을 맛보았다.

생존의 테크트리와 '오도(誤導)'의 미학

• 군생활 테크트리와 3종류의 고참: 군 생활을 잘하는 팁은 약삭빠르게 짬밥을 찾아 먹으면서도, 스스로 위계와 체력을 증명해 '인정'을 바탕으로 배려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참이 되면 세 부류로 나뉜다.

1. 당당형: 군생활 테크트리를 완벽하게 쌓아 스스로 떳떳하고 실력으로 후임을 제압하는 유형 (가장 이상적).

2. 적당형: 군생활 테크트리 실패를 자인하고 얌전하게 지내는 완충 지대.

3. 철면피형: 실력은 없으면서 자기 미화와 똥군기로 후임들의 불만을 쌓는 최악의 선임형.
해병대 고참의 유형

• '오도'가 훈장이 되는 선(Line): 오도(誤導) 해병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악습이 아니다. 주특기 병과 내에 압도적인 실력과, 후임을 인격적으로 짓밟지 않는다는 '선'이 지켜질 때, 오도는 그 극한의 환경을 견뎌낸 자들만이 공유하는 매력적인 암호이자 훈장이 된다. 실력 없는 오도는 허세지만, 실력을 증명한 자의 오도는 범접할 수 없는 '짜세'다.

화려한 오바로크로 군복을 도배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무용담이나 쏟아내는 '입해병'들의 빈 수레 같은 소음보다, 야간 근무를 후임에게 떠넘기지 않고 내 전투복을 내 손으로 다려 입었던 병장 시절의 고독한 도덕성이야말로 진짜 해병대의 명예다.

인간에 대한 환멸, 그리고 남겨진 자부심

벽암지 유격장 시절 가장 끔찍했던 부조리는 '근무 대근(代勤)'이었다. 병장들은 조교 과업을 핑계로 밤에도 일병 조교를 위병소에 밀어 넣었다. 그것은 영창에 가야 마땅할 초특급 인권 유린이자, 수면 박탈을 통한 영혼 말살이었다. 인간의 본성이 극한의 피로 앞에서 얼마나 치졸해지는지, '기수'라는 이름의 위계가 아랫사람을 착취하는 면죄부로 쓰일 때 인간이 얼마나 역겨워지는지 나는 그곳에서 뼈저리게 배웠다. 선임들 조교과업 핑계로 낮에 3타임 연속 6시간 대근, 새벽에 내 근무+선임 근무 1~2타임 4시간, 각종 허드렛일. 무엇보다 월급 만원남짓하던 시절에 휴가비 12만원 모아둔것을 20명 남짓한 부대에서 긴빠이 당한 사건은 그 누구도 믿을수없다는 인간에 대한 환멸 그자체를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장담한다. 내가 병장이 되었을 때, 그 달콤한 대근의 유혹을 뿌리치고 당연한거지만 내 근무를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해냈다는 것. 그것이 내 군 생활 중 빛나는 훈장이자 자부심이다.

지금도 나는 사회에서 "해병대 출신"이라며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경계부터 한다. 타군에 대한 존중은 밥 말아 먹고, 현실에서의 무능을 과거의 군복으로 덮으려는 그 알량한 성질머리 뒤에 숨겨진 '철면피'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진짜 명예는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내 삶의 궤적을 보고 "저 사람은 군 생활도 진짜 제대로 했겠구나"라고 유추하게 만드는 조용한 실력에 있다.

새벽, 거실에 홀로 앉아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2001년의 포항을 떠올린다. 36도의 폭염, 30미터 상공에서 사타구니를 옥죄던 외줄의 마찰열, 그리고 코골이 수술당시 비릿한 오징어 타는듯한 냄새와 피 냄새. 그 지옥 같은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타인의 영혼을 착취하지 않고 온전히 내 두 발로 버텨냈다는 사실만이, 세상을 카메라 뷰파인더로 관찰하듯 건조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바닥일지도 모른다.

방문 너머로 28개월 된 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밤중 수유를 끊고 곤히 잠든 아이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그 미친 기수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끝내 인간으로서의 선을 지켰기에, 적어도 내 아이 앞에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진짜 전쟁은, 군복을 벗고 난 뒤 벌어지는 매일의 일상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 포스팅은 개인적인 관찰과 주관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작성된 에세이입니다. 과거 상황과 현재는 다르며 이 글은 과거의 일화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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